1984년 어느 날, 독일 음반사 ECM을 세운 만프레드 아이허는 자동차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독특한 음악을 들었다. 곧장 차를 돌린 그는 어느 언덕에 멈춰서서 침묵 속에 그 음악을 끝까지 감상했다. 정화와 영적인 느낌이 그의 온몸을 휘감았다. 에스토니아 작곡가 아르보 패르트의 곡, 프라트레스(Fratres·형제들)였다. 패르트는 오스트리아 빈에 머물고 있는 현대음악가였다.
아이허는 그길로 패르트의 음반을 만든다. 라틴어로 백지, 깨끗한 석판을 의미하는 ‘타불라 라사(TABULA RASA)’는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세상에 나온 지 40년 된 이 음반을 기리는 전시가 서울 한남동에서 열리고 있다. ‘타불라 라사’에 담긴 수록곡을 한 곡씩 깊이 있게 듣는 특별한 전시다. 음반사 ECM과 전시기획사 UNQP가 협력해 마이알레라는 공간에서 ‘타불라 라사: 침묵, 그 이전’이라는 이름의 전시를 열었다. 3년 전 은퇴한 패르트를 추억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지난달 26일 이곳을 찾았다.
리빙룸 마이알레는 원래 지난해까지 2층 단독 주택이었다. 이를 전시공간으로 탈바꿈하면서 주거 공간은 그대로 살려뒀다. 그러면서 공간에 어울리는 타불라 라사의 수록곡을 들려주고 있다. 방마다 다른 음악을 들을 수 있는데 재생 방식도 진공앰프, 소니의 카세트테이프, CD, 뱅&올룹슨의 하이엔드 오디오 등 제각각인 게 특징이다.
1층 거실. 진공앰프로 아이허가 들었던 프라트레스를 기돈 크레머의 바이올린과 키스 재럿의 피아노로 들을 수 있다. 전통적 클래식 교육을 받은 크레머와 즉흥 재즈 연주자인 재럿이 함께했다는 것에서부터 패르트 음악이 가진 포용을 느낄 수 있었다. 거실 바로 옆 주방과 이어진 작은 공간에서는 패르트가 영국의 한 작곡가를 애도하며 지은 곡이 흘러나온다. 느린 종소리가 세 번 울리고 미디어월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며 추모와 슬픔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이됐다.
2층은 침실이다. 관람객은 자연스럽게 침대에 걸터앉거나 눕는다. 프라트레스의 또 다른 편곡 버전이 CD를 통해 흘러나온다. 김현석 UNQP 대표는 “같은 곡이지만 편곡 방식에 따라 아예 다르게 들리는 게 패르트의 음악”이라며 “공간과 재생 방식도 달라졌기에 더 색다른 느낌을 준다”고 설명했다. 침실 옆 서재에서는 패르트의 또 다른 유명 곡인 ‘알리나를 위하여(Fur Alina)’가 울려 퍼졌다. 놀랍게도 1970년대 판매된 소니의 카세트테이프에서 흘러나온 소리.
이번 전시는 밤에도 문을 닫지 않는다. 음악 감상뿐 아니라 음반 관련 아트워크, 아티스트의 사진, 인터뷰 영상, 멀티미디어 작품 등이 적절히 놓여 있어 감상에 도움을 준다.
전시는 오는 27일까지.
이해원 기자 um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