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흥 연주자처럼…윤희, 쇳물과 마주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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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흥 연주자처럼…윤희, 쇳물과 마주서다

입력 : 2026.05.22 14:11

리안갤러리 개인전 ‘Improvisation’
76세에도 쇳물 던지고 붓는 작업
“즉흥은 몰입…예술은 수행의 과정”

윤희의 ‘Improvisation 1’(2026) <리안갤러리>

윤희의 ‘Improvisation 1’(2026) <리안갤러리>

가녀린 체구의 76세 작가는 여전히 1200도 가까운 쇳물을 붓고 던지고 흘려보낸다. 쇳물은 공기와 중력, 온도와 속도 속에서 순식간에 굳으며 예측할 수 없는 형상을 만든다. 윤희 작가는 그 흐름을 억지로 통제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 “즉흥 연주자가 무대에 서는 상태와 닮았다”고 설명한다.

리안갤러리가 서울 종로구 전시 공간에서 윤희 개인전 ‘임프로비전(Improvisation)’을 열고 조각과 회화 신작을 선보인다. 1980년 프랑스로 이주한 작가는 남프랑스에서 활동하며 조각과 드로잉, 회화를 넘나드는 작업을 이어왔다. 그의 작업 중심에는 물질과 행위, 우연과 필연이 만나는 순간이 놓여 있다.

윤희 작가가 서울 종로구 리안갤러리 서울에서 자신의 조각 연작 ‘임프로비전(Improvisation)’을 설명하고 있다. <정유정 기자>

윤희 작가가 서울 종로구 리안갤러리 서울에서 자신의 조각 연작 ‘임프로비전(Improvisation)’을 설명하고 있다. <정유정 기자>

대표 조각 ‘임프로비전(Improvisation)’은 원뿔 형태 안에서 알루미늄이 녹아 흐르고 굳는 순간을 포착한 작업이다. 작가는 원뿔 형태 구조물 안에 쇳물을 붓고 던진다. 금속은 순식간에 녹아 흐르다가 굳으며 예측할 수 없는 형상을 만든다. 작가는 그렇게 생성된 조각 파편들을 선택해 접합한다. 그는 “틀은 의도적으로 만들지만, 그 이후 일어나는 일은 거의 모두 우연”이라고 설명했다.

서울 종로구 리안갤러리 서울에서 전시 중인 윤희 작가의 조각 ‘크루제(Creuse)’. <정유정 기자>

서울 종로구 리안갤러리 서울에서 전시 중인 윤희 작가의 조각 ‘크루제(Creuse)’. <정유정 기자>

이번 전시에서 눈여겨볼 또 다른 작품은 알루미늄으로 만든 조각 ‘크루제(Creuse)’다. 프랑스로 ‘움푹 들어간’이라는 뜻의 이 작품은 세찬 비가 바닥에 떨어지며 거칠게 튀어 오르는 찰나의 순간을 표현했다. 알루미늄이 떨어지며 바닥을 오목하게 파내기도 하고, 튀어 오른 알루미늄은 진주처럼 맺혀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견고한 금속에 생동하는 움직임과 리듬을 부여했다.

윤희의 ‘Improvisation 20250819’(2025) <리안갤러리>

윤희의 ‘Improvisation 20250819’(2025) <리안갤러리>

이번 전시에서는 회화 작업도 비중 있게 소개된다. 작가는 캔버스 위에 물감을 붓고, 밀어내고, 던지며 화면 위에 흔적과 움직임을 남긴다. 검은색을 주로 사용해온 이전 작업과 달리 이번 신작에는 빨강·주황·노랑·초록·파랑·남색·보라 등 무지갯빛 색채가 두드러진다.

윤희의 ‘Improvisation 20251202’(2025) <리안갤러리>

윤희의 ‘Improvisation 20251202’(2025) <리안갤러리>

전시 제목인 ‘임프로비전’은 작가의 작업 태도를 상징한다. 작가는 작업할 때 스스로가 즉흥 연주자와 같다고 밝혔다. 그는 “즉흥은 몰입의 상태”라며 “머리로 계산하기보다 몸과 감각이 맞물리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이어 “어떤 순간에는 내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그림이 나를 그리고 있는지 모를 때가 있다”며 “즉흥은 실패의 가능성이 크지만 그 불확실성 때문에 새로운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예술은 미지의 세계를 마주하는 과정이고, 즉흥은 이를 위한 수행이자 고행”이라고 덧붙였다.

윤희 작가가 서울 종로구 리안갤러리 서울에서 자신의 회화 연작 ‘임프로비전(Improvisation)’을 앞에 서 있다. <정유정 기자>

윤희 작가가 서울 종로구 리안갤러리 서울에서 자신의 회화 연작 ‘임프로비전(Improvisation)’을 앞에 서 있다. <정유정 기자>

남프랑스를 기반으로 활동해온 작가는 이미 20여 년 전 세계 미술계에서 역량을 인정받은 바 있다. 2002년과 2003년 프랑스 아트페어인 피악(FIAC)에 연속으로 참여했으며, 당시 이우환, 이배, 박서보 등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들과 함께 이름을 올렸다.

작가는 프랑스 피레네 산맥 인근 오포 페릴로스 지역에서 오랜 시간 작업해왔다. 반경 수 ㎞ 안에 인적이 거의 없는 곳에서 그는 은둔하듯 작업에 몰두했다. 작가는 “사방이 뚫린 곳에서 석양이 하늘 전체를 덮는 풍경을 본다”며 “이러한 자연의 빛이 작업에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인위적인 통제를 내려놓고 우연에 몸을 맡기는 그의 작업은 자연을 닮았다. 전시는 6월 30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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