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서 중앙은행 총재 출신 국가 수반이 탄생했다. 마크 카니 전 캐나다중앙은행 총재가 지난 9일(현지시간) 집권 여당인 자유당의 당대표로 선출되면서다. 중앙은행 총재 출신으로 국가 수반이 되는 사례는 매우 드물지만 처음은 아니다. 이탈리아와 인도에서도 그런 사례가 있었다.
캐나다 총리를 맡게 될 카니 신임 대표는 1988년 미국 하버드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계 글로벌 은행 골드만삭스에서 일하다가 2003년 캐나다은행에 부총재로 영입됐고 4년 후인 2007년 총재로 임명됐다. 그는 임기 중 글로벌 금융위기 대응에 주력했다. BBC에 따르면 당시 카니는 말을 아끼던 기존 총재들과 달리 기준금리를 대폭 인하한 뒤 적어도 1년 동안 낮은 수준을 유지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히며, 시장 침체 속에서도 기업들이 투자를 지속할 수 있도록 도왔다.
2013년에는 캐나다은행 총재 임기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영국 중앙은행 총재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전후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며, 영국 언론으로부터 ‘록스타 중앙은행장’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이탈리아에서도 중앙은행 총재 출신 총리가 있었다.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 중앙은행(ECB) 총재다. 그는 메사추세츠공대(MIT)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이탈리아 재무부 국장, 골드만삭스 부회장 등을 거친 후 2006년 이탈리아중앙은행 총재에 임명됐다. 약 5년간 이탈리아중앙은행을 이끈 후 2011년 ECB 총재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2011년 유로존 위기 당시 유로화 양적완화, 마이너스 금리 등을 관철시키며 경제 회복을 주도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경제학과 석좌교수로부터 "현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중앙은행장"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그가 정치에 뛰어든 것은 총재 임기를 마무리 한 지 약 1년 반이 흐른 2021년이다. 그는 코로나19 사태가 이어지던 2021년 2월 이탈리아 총리에 취임했다. 그는 2022년 11월까지 약 1년 9개월 간 이탈리아를 이끌었다. 취임 초기에는 유럽 내 이탈리아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받았지만 연정 붕괴로 두차례의 신임투표 끝에 예상보다 빠르게 물러났다.
인도에서는 작년 말 별세한 고(故) 만모한 싱 총리가 1980년대에 인도 준비은행 총재를 맡은 적이 있다. 그는 중앙은행에 이어 1991년부터 재무부를 이끌면서 인도의 경제 개혁을 주도했다. 국영기업 할당제 등을 폐지하면서 사회주의 경제체제였던 인도를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2004년부터 2014년까지 10년간 총리를 맡으면서 이같은 경제 개방 정책을 더 강하게 추진했다. 총리에서 물러난지 10년만인 지난해 12월 세상을 떠났다.
중앙은행 총재 출신으로 나라를 이끈 경우는 이들을 제외하면 주요국에선 사례를 찾기가 어렵다. 하지만 이들이 이례적으로 집권한 경우를 보면 대부분 경제에 큰 위기가 왔을 때다. 카니 총리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관세 전쟁을 이끌어야 한다. 드라기 전 총리는 코로나 위기의 한복판에 취임했고, 싱 전 총리는 경제 체제 자체를 바꾸는 과제가 있었다.
다만 중앙은행 총재에서 곧바로 국가 수반에 오른 경우는 없었다. 정치 체제를 놓고 봐도 세 사람 모두 다수당 총수가 나라를 이끄는 의원내각제 국가를 이끈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한 때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의 정치권 영입설이 있었다. 그가 내는 메시지가 정치적으로 해석돼서다.
이 총재는 취임 직후부터 경제의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를 냈다. 구조개혁 없이는 더 이상 성장률을 높이기 어렵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최저임금, 교육, 농산물 수입 등 정치적 논란이 되는 경제 이슈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냈다.
지난해 말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이후엔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의 헌법재판관 임명을 지지하고, 이를 반대한 국무위원을 비판하면서는 정치적 메시지를 내고 있다는 비판을 집중적으로 받기 시작했다. 추가경정예산안(추경) 편성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도 '정치적'이란 시각이 많았다.
이에 대해 이 총재는 지난 1월 통화정책방향 회의 후 기자간담회에서 "정치적 메시지라고 하는데 굉장히 경제적인 메시지라고 생각한다"고 일축했다. 그는 "대외 신뢰도와 관련해 외국 신용평가사의 시각이 굉장히 나빠지고 있는 걸 알고 있는 상황에서 금리를 몇 퍼센트 낮추는 것보다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이런 메시지가) 더 중요했다"고 설명했다.
강진규 기자 jos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