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욱의 술기로운 한국사] 섬 평야에서 재배한 쌀과 보리로 소주 증류
대마도와 달리 농업 가능한 이키섬
이 소주는 일본 나가사키현 북서쪽 작은 섬인 이키섬(壹岐島)에서 생산된다. 이키섬은 규슈와 대마도(쓰시마섬) 사이에 위치하는데,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만큼 오래전부터 문화적 교류가 활발했던 지역이다.
이키섬은 일본에서 보리소주(麦焼酎) 발상지로 여겨진다. 흥미로운 건 그 기술적 기원이 조선과 연결돼 있다는 점이다. ‘조선왕조실록’ 조선 태종 4년(1404) 1월 9일 기록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대마도 수호관 종정무에게 편지를 보내고 소주 10병과 마늘, 곶감, 잣 등을 함께 하사하였다.” 이는 일본이 인정하는 자국의 가장 오래된 소주 기록이자, 조선이 외교 예물로 소주를 활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 밖에 조선 전기 각종 문헌에 대마도 영주 관련 소주가 46차례나 등장한다. 이는 소주가 국왕의 위엄과 문화적 정체성을 전달하는 상징적 교류품이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렇게 조선에서 전해진 소주는 대마도에 바로 뿌리 내리지는 못했다. 대마도는 산과 구릉이 대부분인 척박한 지형으로 쌀 재배가 거의 불가능했다. 농업이 약하다 보니 술 원료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어려웠고, 소주를 만들 기반이 부족했다. 현재 대마도에는 ‘가와치주조(河内酒造)’라는 단 하나의 양조장만 남아 있다. 청주와 소주를 모두 만들기는 하지만 쌀은 일본 본토에서 수급한다.소주는 그 대신 대마도에서 남동쪽 방향으로 50㎞가량 떨어진 이키섬에서 꽃피우게 된다. 이키섬은 일본에서도 드물게 평야가 형성돼 있고 지하수가 풍부해 농업이 가능한 지역이다. 쌀과 보리를 재배할 수 있다 보니 증류 기술이 유입된 이후 자연스럽게 소주 양조가 시작됐다. 특히 에도 시대에는 조세 제도상 쌀에 세금이 부과됐지만 보리는 예외였다. 이에 농민들은 세금을 피하고자 보리 재배를 늘렸고, 결과적으로 보리소주 생산의 기반이 다져졌다.
이키산 소주에 대한 가장 이른 문헌 기록은 1791년이다. 1899년 주세법이 시행됐고, 이후 1902년 이키섬에서만 소주 양조 면허가 55건 발급될 정도로 활기를 띠었다. 1930년대 들어서는 소주 생산량이 청주(사케)를 추월했으며, 1984년에는 청주 양조가 전면 중단돼 소주만 남았다. 1995년에는 일본 국세청을 통해 ‘이키소주’가 WTO(세계무역기구) 지리적 표시(GI)로 등록돼 공식적으로 보호받게 됐다. 현재는 매년 7월 1일을 ‘이키소주의 날’로 지정했을 만큼 지역 대표 특산물로 자리 잡았다.
한국 단어, 이키섬 방언으로 스며들어현재 이키섬에는 보리소주 양조장이 7곳 있다. 섬에서 재배한 보리와 지하수를 사용하는 전통 방식으로 소주를 빚고 있다. 추성훈이 마신 ‘친구(ちんぐ)’가 바로 이 이키섬에서 생산되는 대표적인 소주 브랜드 중 하나다. 1924년 설립돼 100년 가까운 전통을 자랑하는 ‘오모야주조(重家酒造)’에서 제조한다.브랜드명 ‘친구(ちんぐ)’는 이키섬 토착 방언으로 친구를 뜻한다. 한반도와 인접했다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한국어 단어들이 이 지역 방언으로 스며든 사례가 여럿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을 뜻하는 ‘얀반(ヤンバン)’, 바지를 뜻하는 ‘팟치(パッチ)’ 같은 단어가 여전히 일상적으로 쓰이고 있다.
지금도 이키섬의 한 소주 양조장은 한국 전통 증류기인 ‘소줏고리’를 전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 유래가 조선에 있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이키섬 현지에서도 소주가 조선에서 기원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으며, 한반도와 일본을 잇는 ‘통로’로서 정체성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10여 년 전 필자가 이키섬을 방문했을 때 느낀 인상은 명확했다. 작고 조용한 섬이지만 에메랄드빛 해안과 맑은 공기, 정갈한 온천과 섬사람들의 친절함이 더해져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바다에서 갓 잡은 성게로 만든 덮밥부터 농업 부산물로 키운 쇠고기 요리까지 음식 또한 정직하고 인상 깊었다. 무엇보다 감동적인 점은 이 섬의 술 한 병에 조선과 일본,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역사가 깃들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친구(ちんぐ)’라는 일본 소주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우정과 문화의 흔적이며, 한 잔 술로 시대를 넘나드는 대화를 가능케 하는 연결점이다.
명욱 칼럼니스트는… 주류 인문학 및 트렌드 연구가. 숙명여대 미식문화 최고위과정 주임교수를 거쳐 세종사이버대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술품’과 ‘말술남녀’가 있다. 최근 술을 통해 역사와 트렌드를 바라보는 ‘술기로운 세계사’를 출간했다.
[이 기사는 주간동아 1495호에 실렸습니다]
명욱 주류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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