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미술사에서 가장 악명 높은 그림, 불멸의 초상화 ‘마담 X’(1884)를 아는가. ‘초상의 대가’ 존 싱어 사전트(1856~1925)가 28세에 그린 한 여인의 모습이다. 지금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사전트×파리’는 18세에 프랑스 파리 미술계에 입성해 그가 10년간 쏟아낸 작품들과 그 시기 유럽 아프리카 대륙을 방랑하며 그려낸 최고 걸작 100점을 회고한다. 올해는 그의 서거 100주년이다.
‘마담 X’는 할 말 많은 그림이다. 우선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대표 소장작이다. 이 미술관에서 ‘꼭 봐야 할 명작’에 언제나 손꼽히는 그림이다. 당대 최고의 화가는 어쩌다 ‘마담 X’로 악명 높은 화가가 된 걸까. 이 그림은 왜 파리에서 그려져 뉴욕에 와 있는가. 이 이야기는 그의 청년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원조 유목민…세계를 떠돈 여행자
사전트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1856년 미국인 부모 사이에 태어났다. 부유한 가정에서 ‘그림 잘 그리는 아이’로 자란 그는 18세가 되던 해(1874년) 학생 신분으로 파리에 간다. 유럽 미술계의 중심지로 변하던 때, 음악과 미술을 사랑한 사전트는 파리 사교계의 문화 생활에 흠뻑 빠져든다. 루브르박물관의 웅장한 고대 유물도, 인상파 화가들도 그에겐 온통 매력으로 다가왔다. 여러 언어에 능통한 그는 예술가, 작가, 후원자 사이를 누비는 사람이기도 했다.
방랑벽도 유난했다. 사전트는 방학 때마다 여행하며 보냈다. 그는 종종 미국인으로 묘사되지만, 어느 한 국가에 속하지 않았다. 노르망디와 브르타뉴 등 프랑스 해안 근처에서 영감을 얻었고, 20세에 처음 미국으로 향했다. 그는 당시 인기 있었던 지역의 사람들, 건축물, 그리고 바다 풍경을 주로 주제로 삼았다. 프랑스 남부 바닷가 캉칼에서 굴을 채집하는 사람들(1877년), 이탈리아 카프리 해변의 풍경과 춤추는 여인들(1879년), 스페인 알람브라 궁전과 모로코의 풍경화(1879~1880년), 베네치아의 건축물과 골목길과 인물들(1880~1882년) 등을 보자. 여행이 쉽지도 않았을 그 시기 사전트가 얼마나 많은 모험을 했는지 알 수 있다.
그 시기 파리에는 최대 규모의 국가 후원 전시이자 화가들의 올림픽으로 불리던 ‘파리 살롱’이 있었다. 1878년 스승인 카롤뤼 뒤랑의 초상과 카프리섬의 풍경화를 출품해 특별상을 받았다. 비평가들은 “제자가 스승을 능가했다”고 평했다. 그의 나이 스물 둘이었다.
잘나가는 작가에서 조롱거리로
1880년대 초 사전트는 대중적인 경력을 쌓기로 결심한 뒤 야심 찬 그림들을 그렸다. 주로 지인과 후원자들의 초상화였다. 그는 1882년 파리 살롱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샤를로트 부르크하르트의 초상화와 스페인 플라멩코를 강렬하게 묘사한 기념비적인 ‘엘 할레오’는 그를 ‘파리에서 가장 화제가 되는 화가’로 만들었다. 이듬해 또 다른 걸작을 내야 하는 압박에 고민하다가 그려낸 미국인 친구의 아이들 그림 ‘에드워드 달리 보이트의 딸들’(1882)은 또 한 번 그를 정점에 올려놨다.
19세기 후반 파리의 세련되고 현대적인 여성, 소위 ‘파리지앤느’는 프랑스의 국가적 자부심과도 같았다. ‘마담 X’ 스캔들은 이런 분위기와 연관이 깊다. 그림의 모델은 비르지니 아멜리 아베뇨 고트로(1859~1915). 당시 파리에서도 유명한 사교계 인사였다. 미국 뉴올리언스에서 프랑스계 부모 사이에 태어나 어린 시절 파리로 이주해 1879년 프랑스 은행가와 결혼한 여인. 사전트는 1884년 파리 살롱에 출품할 작품의 모델로 직접 골랐다.
사전트는 (누구나 아는 얼굴이지만) 미스터리한 작품명을 달아 파격적 작품을 내고 싶었고, 출품명을 ‘마담***’로 달았다. 고트로 역시 작품이 완성된 직후 “이 초상화는 ‘걸작’”이라고 평했다. ‘마담***’은 1884년 파리 살롱에 출품된 2488점의 그림 중 하나로 전시됐는데, 이때부터 손가락질이 시작됐다. 매부리 같은 뾰족한 콧날에 가느다란 눈을 한 옆모습과 석고처럼 창백한 피부, 깊게 파인 검정 드레스 위에 목은 지나치게 긴 여인의 초상. 무엇보다 어깨끈이 살짝 흘러내린 오른쪽 팔(지금은 어깨끈이 제 위치에 가 있다)은 어딘가 부자연스럽게 뒤로 돌아가 있었기 때문이다. 파리지앤느의 소위 ‘벌거벗은 모습’은 관람객에게 충격을 줬다.
이방인에 대한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차가운 시선
그의 그림을 아무리 다시 봐도 혹평에 시달릴 그림은 아닌데 그때의 파리 사람들은 왜 그랬을까. 당시 파리 사교계는 겉으로 귀족적이고 고상한 분위기를 한껏 풍기면서 매춘과 불륜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던 때였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쉬쉬하던 사실을 이방인인 사전트가 일부러 ‘퇴폐미를 지닌 부유한 여성’을 그려 적나라하게 고발한 것으로 프랑스인들은 해석했다.
유명 인사이던 고트로의 도덕성과 관련해서도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모욕적인 말이 평단과 대중 사이에 퍼져 나가자 그림이 걸작이라고 평했던 고트로마저 어머니와 함께 그를 찾아와 울면서 그림을 당장 내려 달라고 했다.
사전트는 전시가 끝난 뒤 그림을 돌려받고, 어깨끈을 지금의 그림처럼 수정했다. 전시장엔 사전트가 그린 습작 스케치도 함께 전시됐는데, 어깨끈이 아예 없는 미완성 상태에 사전트가 (마치 뭉크의 ‘절규’와 같은) 오묘한 스케치를 그려 넣었다.
절망한 사전트는 29세에 영국 런던으로 이주해 1925년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파리에서의 스캔들이 워낙 파급력이 컸기 때문에 영국에서의 초기 평판도 악화된 상황이었지만, 그림을 계속 그려 재기에 성공했다.
벼랑 끝으로 내몬 그것 “내 생애 최고의 걸작”
사전트는 파리를 떠났지만, 떠나지 않았다.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가장 인기 있는 초상화가가 된 그는 파리를 자주 오가며 전시도 했다. 모네에겐 “파리가 나를 잊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도 했다. 파리에서 보낸 10년이 그의 모든 예술적 영감과 테크닉, 인간관계를 만들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평생 간직한 셈이다.
사전트는 생애 최악의 순간을 안긴 ‘마담 X’를 30여 년간 간직하다가 1916년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 팔았다. 모델인 고트로가 사망한 이듬해였다. 올해는 사전트의 서거 100주년. 메트로폴리탄미술관과 파리 오르세미술관이 공동 기획한 이 전시는 오는 9월 사전트에게 인생 최악의 굴욕을 안겼던 도시이자 그가 가장 사랑한 파리로 옮겨간다. 프랑스에서 열리는 사전트의 첫 단독 전시이자, ‘마담 X’가 40여 년 만에 처음으로 프랑스로 건너가는 사건이다. 뉴욕 전시는 8월 3일까지, 파리 전시는 9월 23일부터 2026년 1월 11일까지다. 그가 죽은 지 100년이 지난 지금, 프랑스 비평가들은 이 전시를 과연 어떻게 해석할까.
뉴욕=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