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효림의 베스트셀러 레시피] |
많은 사람들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는 베스트셀러. 창작자들은 자신이 만든 콘텐츠가 베스트셀러가 되길 꿈꾸지만, 실제로 실현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이 희귀한 확률을 뚫고 베스트셀러가 된 콘텐츠가 탄생한 과정을 들여다본다. 창작자의 노하우를 비롯해 이 시대 사람들의 욕망, 사회 트렌드 등을 확인할 수 있다. |
#1. 정지용의 시 ‘향수’에 나오는 ‘얼룩백이 황소’는 흰색과 검은색이 어우러진 점박이 무늬 홀스타인 젖소일까. 우리나라에 홀스타인 품종의 소가 널리 보급된 건 1960년대 이후다. ‘향수’가 발표된 건 1927년이다.
시에 나온 얼룩백이는 칡소다. 칡소는 호랑이처럼 줄무늬가 있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 소는 누런 소 외에도 흰 소, 검은 소, 칡소 등으로 다양했다. 박목월의 시를 동요로 만든 ‘얼룩송아지’의 가사 ‘송아지 송아지 얼룩송아지/엄마 소도 얼룩소 엄마 닮았네~’에 나오는 얼룩소도 칡소다.
그렇다면 황소는 누런 소일까. 아니다. 황소는 큰 수소를 뜻한다. 색깔과 상관없이 다 성장한 수소가 황소다. 수소는 암소보다 커서 큰 소라는 의미에서 ‘한쇼’라고 부르던 말이 변해 황소가 됐다. 즉, 시 ‘향수’ 속 ‘얼룩백이 황소’는 수소 칡소다.#2.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에 나오는 동백꽃은 붉은색 꽃잎의 꽃일까. 동백은 우리나라에선 남쪽 해안가에서 많이 자란다. 김유정의 고향인 강원도의 내륙에서는 볼 수 없다. 김유정은 소설에 강원도 방언을 많이 썼다. 강원도 방언으로 동백은 생강나무다. 소설 속 동백꽃은 생강나무꽃이다. 이는 소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산기슭에 널려 있는 굵은 바윗돌 틈에 노란 동백꽃이 소보록하니 깔리었다…(중략)…그리고 뭣에 떠다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생강나무꽃은 알싸하면서도 향긋한 향기가 난다. 강원도에서 생강나무를 동백이라 부른 건 동백과 생강나무의 용도가 같았기 때문이다. 동백나무 씨앗에서 짠 동백기름은 식용은 물론 여성들이 머리카락에 바르는 용도로 썼는데 동백이 자라지 않는 강원도에서는 생강나무 열매로 기름을 짜서 사용했다. 동백기름 대신 사용하기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그 이름까지도 동백으로 부르게 됐다고 한다.무심히 지나쳤던 시, 소설은 물론 일상에서 사용하는 단어의 정확한 뜻과 유래를 역사, 지리, 문화 등 여러 측면에서 짚은 ‘단어가 품은 세계’(빛의서가)에 담긴 내용이다. 황선엽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55)가 쓴 이 책은 지난해 11월 출간된 후 두 달 만에 1만 권이 판매됐다.(국내 출판계의 베스트셀러 기준은 책 판매량 1만 권이다.) 독자들에게 “신선하고 흥미로운 고급 인문학 강의”라는 평을 받으며 지금도 꾸준히 판매되고 있다. 온라인 서점 예스24와 알라딘에서 ‘오늘의 책’으로 선정됐고, 밀리의 서재에서 종합 1위에 오르기도 했다.
황 교수와 책을 낸 봉선미 리더스 그라운드 대표(40)를 10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의 황 교수 연구실에서 만났다. 빛의서가는 리더스 그라운드의 출판 브랜드다.
“단어들은 하나하나가 이야기를 지니고 있어요. 이 말이 왜 생겼는지, 어떤 사연이 있는지 풀어내면 좋겠더라고요. 이 분야의 최고 전문가이면서 이를 대중에게 알리고 싶어 하는 분을 찾았어요. 그러다 황 교수님이 한글에 대해 쉽고 재미있게 말씀하시는 포털의 영상을 발견했습니다. 관악경찰서에서 인문학 강의도 하셨더라고요. 국어사를 전공하셨고요. ‘이 분이다!’ 싶었죠.”
황 교수는 단어의 유래와 의미 등을 흥미롭게 설명해 전공수업인 ‘국어사’, 교양수업인 ‘한글맞춤법’은 인기 많은 강의로 유명하다. 한글맞춤법 강의는 수강생이 크게 늘어 반을 나눠야 했다.
봉 대표는 2023년 여름 황 교수에게 ‘우리말의 세계’라는 가제로 기획안을 써서 출간 제안 메일을 보냈다. 그 해는 봉 대표가 1인 출판사를 창업한 해였다. 황 교수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기획 의도는 반갑고 좋았어요. 한데 그 해부터 국립국어원에서 진행하는 어원 사전 만들기 연구 책임자를 맡게 됐습니다. 참여하는 연구자가 70여 명에 이르는 대규모 프로젝트여서 책을 쓸 엄두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
봉 대표는 다시 메일을 보내 “원고를 완성할 수 있게 도와드리겠다”고 했다.
“아쉬워서 그냥 접을 수 없었어요. 교수님도 책을 쓰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걸 알았기에 시간 낼 방법을 찾으면 될 것 같았거든요. 출판사를 응원해주시는 말씀도 고마웠고요. 이렇게 다정하고 배려가 깊은 분은 반드시 저자로 모셔야겠다고 결심했죠.”
황 교수는 두 번째 메일을 받고 고민했다.
“포기할 줄 알았는데 뜻밖이었습니다. 평소 단어에 대해 책을 쓰고 싶은 생각은 있었어요. 주위에서도 자주 출간을 권했고요. 한데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한 글쓰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어요. 오래 전 중고등학교 교과서를 쓴 적이 있는데요, 중고생 눈높이에 맞추는 게 만만치 않더라고요. 대표님이 시간을 내도록 돕겠다고 제안해 다시 생각했습니다. 상세한 기획안을 보낼 정도로 열의를 지닌 모습도 인상적이었어요.”
결국 황 교수는 수락했다. 강연하듯 구어체로 쓰는 게 좋다고 판단해 황 교수가 강의하면 그 내용을 적어서 정리했다. 한데 뭔가 부족했다. 황 교수는 “말로만 하니까 전달하고 싶은 내용의 70% 정도만 담기는 것 같았다. 직접 쓰는 게 나을 듯했다”고 말했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황 교수는 “집중해서 오래 쓰는 게 익숙해 틈틈이 쓰는 걸 못한다”고 했다. 이에 봉 대표는 “한 달에 2, 3일 교수님 연구실에 하루 종일 있겠다. 그 때 글을 쓰시라”고 제안했다. 황 교수도 해당 날짜에는 다른 일정을 잡지 않고 글만 썼다. 이른바 무조건(?) 글쓰기 프로젝트라고 할까.
“교수님이 글 쓰시는 동안 저는 다른 업무를 했어요. 책에 들어갈 단어 등 모든 내용은 교수님이 정하셨습니다. ‘얼룩백이 황소’가 어떤 소인지, 소설 ‘동백꽃’의 동백꽃이 어떤 꽃인지 물어보셨는데요, ‘벙 찌는 듯’했어요. 설명을 들을수록 삶에 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황 교수는 봉 대표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하루 종일 글을 쓰니 효율적이었다고 했다.
“대표님이 어떤 부분이 재밌는지, 어떤 게 어려운지 말해주셔서 두 꼭지 정도 쓰고 나니 감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점점 속도도 붙었고요. 많은 분들이 옛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알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요, 지식을 널리 나누는 방법을 깨달았습니다.”
황 교수는 구어체로 이야기를 들려주듯 썼다. 지명의 의미를 알면 지리도 새롭게 보인다고 말한다. 순우리말인 애오개는 한자로 兒(아이 아)와 峴(고개 현)으로 적어 ‘아현’이 됐다. 현재는 兒(아이 아)를 阿 (언덕 아)로 바꿔 阿峴(아현)으로 적고 있다. 이들 단어는 서울지하철 2호선 아현역, 5호선 애오개역으로 각각 사용하고 있다.
대치와 한티도 마찬가지다. 큰 고개라는 뜻의 한티를 大(큰 대), 峙(고개 치)를 사용해 대치로 쓴 것. 한티와 대치는 같은 뜻이지만 서울지하철 3호선 대치역, 수인분당선 한티역처럼 마치 다른 지명처럼 인식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으로 유명한 명량(鳴梁)은 순우리말인 울돌목을 한자로 쓴 것이다. 진도와 육지 사이의 좁은 해협에 물살이 매우 거세게 흐르는데 그 소리가 커서 마치 우는 듯이 들린다고 해서 울돌목이라고 불렀다. 울돌목을 한자의 뜻으로 적어 鳴(울 명) 梁(돌 량)이라 한 것이다. 현재 공식 명칭은 명량이 됐다.
식물 이름 중 ‘며느리밥풀꽃’, ‘며느리밑씻개’처럼 비속하거나 현대 상황과는 맞지 않는 건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며느리밥풀꽃은 며느리가 밥이 잘 됐는지 알아보려고 밥알 몇 개를 맛보다가 시어머니에게 맞아죽은 후 그 무덤에서 붉은 입술에 밥풀을 머금은 듯한 꽃이 피어나서 그렇게 부르게 됐다고 전해진다. 며느리밑씻개는 줄기에 갈고리모양의 가시가 잔뜩 박혀 있는 식물로, 그 잎으로는 변을 본 후 밑을 씻을 수 없다. 학대받는 며느리의 모습과 며느리에 대한 당시의 인식이 여지없이 드러난다는 것.
5개월 가량 봉 대표가 연구실로 출근(?)했다. 집필 과정을 함께 하며 의견을 조율하니 원고를 다듬는 작업도 수월했다.
한 공간에서 저자와 편집자가 하루 종일 함께 지내는 게 부담스럽진 않았을까. 봉 대표는 “연구실에 학생들이 수시로 드나들면서 교수님에게 질문하거나 한쪽에 자리 잡고 공부하기도 해서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에 대해 황 교수는 국문과의 전통이라고 했다.
“연구실에는 주로 대학원생들이 많이 옵니다. 국문과는 학생과 교수가 수시로 의견을 나누며 연구하는 전통이 오래 전부터 이어져 내려왔어요. 늘 학생들이 오기에 대표님이 있어도 불편할 건 전혀 없었습니다.”
제목을 비롯해 목차 등은 모두 봉 대표가 정했다. 봉 대표는 “글을 다루는 분들은 요구 사항이 많은데, 국문과 교수님인데도 모든 걸 전적으로 일임하셔서 놀랐다”고 말했다. 황 교수는 “책은 편집자의 전문 영역이라 대표님의 감각을 믿었다”고 했다.
황 교수는 초판을 2000권 찍었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고 한다.
“학술서는 500권을 찍어도 다 나가기 힘들거든요. 그런데 한 번에 2000권이나 찍어도 되나 걱정되더라고요.”
얼마 안 돼 증쇄를 거듭하자 더 놀랐다고 한다. 독자들은 “세상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삶을 새롭게 보게 됐다”, “언어를 단순한 도구가 아닌 삶의 일부로 느끼게 해준다”는 리뷰를 남겼다. 딸 넷을 둔 황 교수는 “네 딸들이 책을 보더니 ‘아빠가 뭘 연구하는지 이제 알겠다’, ‘아빠를 다시 봤다’고 했다”며 웃었다.
후속책도 집필에 들어갔다.
“한창 쓰고 있는데 지난해 8월 말쯤 대표님이 끝내자고 하더라고요. ‘어? 더 쓸 게 있는데요?’라고 했더니 한 권 분량으로 충분하다며 나머지는 두 번째 책에 담자고 했어요. 이렇게 글을 쓸 수 있게 도와줄 분은 없어요. 너무나 고마운 분을 만났습니다.”
봉 대표는 “교수님이 편하게 대해 주셔서 책 만드는 과정이 즐거웠다”며 “여러 기획 아이디어도 얻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황 교수는 고등학교 때 독일어를 배우면서 독일어에 빠져들었다.
“국사학과나 독문과로 진학할 생각이었어요. 고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역사와 어학이 결합된 학문이 국어사’라며 국문과 진학을 권하셨어요. 당시 선생님이 충남대 국문과에서 국어사로 박사 과정을 밟고 계셨거든요. 고전문학이 재미있어서 국어사를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했죠. 그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웃음)”
2011년부터 편집자로 일한 봉 대표는 다산북스 등 여러 출판사에서 철학 과학 경제경영 등 여러 분야의 책을 냈다. 마라톤 풀코스를 수차례 완주하고 자전거 타기, 수영을 즐긴다. 제빵을 배우고 재봉틀로 옷을 만들기도 하는 등 여러 분야에 호기심이 많다.
“더 좋은 삶을 위한 수단이 책이라고 생각해요. 책을 읽은 후 이 분야에 대해 더 알고 싶다, 혹은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하는 책을 만들고 싶습니다.”
황 교수는 연구한 결과를 바탕으로 꾸준히 책을 낼 계획이다.
“‘단어가 품은 세계’를 낸 후 도서관 등에 강의를 가면 50세 넘는 분들이 절반 정도 되더라고요. 여러 세대가 진지하게 귀 기울이는 모습에 기뻤습니다. 제가 가진 지식을 더 많은 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단어가 품은 세계’(2024년·빛의서가)는…. |
황선엽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단어의 뜻과 탄생 배경, 변화 과정 등을 역사, 지리, 문화를 포함해 여러 측면에서 짚었다. 정지용의 시 ‘향수’에 나오는 ‘얼룩백이 황소’는 호랑이처럼 줄무늬가 있는 칡소의 수소다. 오늘날 한우의 대표는 누런 소가 됐지만 전통적으로 우리나라 소는 누런 소 외에도 흰 소, 검은 소, 칡소 등으로 다양했다. 황희 정승 이야기에도 검은 소가 나온다. 황희가 젊은 시절 누런 소와 검은 소로 밭을 가는 노인에게 “어느 소가 일을 더 잘하느냐?”라고 묻자 노인이 다가와 귓속말로 답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콩쥐팥쥐 설화에도 검은 소가 나온다. 콩쥐가 나무 호미로 자갈밭을 매다 호미가 부러져 울고 있자 하늘에서 검은 소가 내려와 밭을 갈아준다. 예전에는 우리나라에 검은 소가 많이 있었고 친숙했기에 이런 이야기가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돼지고기 부위 중 갈매기살은 왜 이렇게 불릴까. 갈매기살은 갈비와 삼겹살 사이 부위다. 갈매기살의 갈매기는 ‘가로막’이 변한 형태다. 갈비가 있는 가슴과 삼겹살이 있는 배를 구분하는 얇은 막이 가로막이다. 한자어로 횡격막이다. ‘어떤 것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도구’라는 의미의 ‘가로막이’라는 말도 있다. 가로막은 가슴과 배 사이를 막고 있다는 점에서 가로막이와 유사하다. 이에 가로막과 가로막이가 혼동해 쓰이다가 가로막을 가로막이라고 부르게 됐다. 그러다 돼지의 가로막에 붙은 근육을 가로막이살이라고 하게 됐다. 시간이 흘러 가로막이는 가로마기로, 다시 가로매기로 변했다. 가로막살이 가로매기살로까지 변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단어를 정확히 이해할 수 없을 때 잘 아는 단어로 바꿔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가로매기살에서 가로매기라는 형태를 이해할 수 없게 되자 음상이 비슷하면서 잘 아는 단어인 갈매기로 치환해 사용했다는 것. 갈매기살이라는 명칭이 등장한 건 1980년대로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케첩은 중국어에서 유래한 말이다. 중국에서 쓰던 말이 말레이 지역에 전파됐고 그 말이 영어로 들어가 케첩이 됐다는 것. 키오스크는 궁궐을 뜻하는 페르시아어가 튀르키예어로 들어가면서 정원 등에 설치하는 작은 개방형 건물을 의미하게 됐다. 이것이 유럽에 들어오면서 역시 개방형 건물을 뜻했다. 그러다 거리의 가판대라는 의미로 바뀌고 최근에는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는 기기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이처럼 단어에는 인간의 삶, 시간의 흐름, 지역적 특징 등이 두루 반영돼 있음을 차근차근 들려준다. 단어를 통해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창이 열린다. |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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