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사증’이 뭐길래… 북한군은 왜 목숨을 내거는가[주성하의 ‘北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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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


지난달 5일 북한 특수부대 군인들이 김정은 앞에서 공격훈련을 진행하는 모습. 뉴스1

지난달 5일 북한 특수부대 군인들이 김정은 앞에서 공격훈련을 진행하는 모습. 뉴스1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9일 열린 전승절 80주년 기념식에 김정은은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28명의 국가수반이 선 붉은 광장 주석단에서 ‘원 오브 뎀’으로 비춰지는 것이 싫었던 것일까요. 아니면 경험해보지 못한 다자 정상 외교가 부담이었을까요.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치르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김정은이 일등공신이라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자국의 군수물자를 탈탈 털어 보내주고, 심지어 참전 병력까지 보내준 국가 지도자는 김정은 밖에 없습니다.

국가정보원은 지난달 30일 러시아에 파병된 북한군 1만5000명 가운데서 47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중 전사자는 600여명이라고 밝혔습니다.

김정은도 지난달 28일 노동신문에 발표한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군사위) 서면 입장문을 통해 러시아 파병 사실과 전사자 발생을 공식화했습니다.

김정은은 “자랑스러운 아들들의 영용성을 칭송하여 우리 수도에는 곧 전투위훈비가 건립될 것”이라며 “희생된 군인들의 묘비 앞에는 조국과 인민이 안겨주는 영생 기원의 꽃송이들이 놓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몇 명이 희생됐다는 언급은 없었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전사한 북한군 품속에서 나온 사진들. 오른쪽 사진은 전사한 군인이 휴가를 나왔다가 여동생과 찍은 사진이다. NK인사이더

우크라이나에서 전사한 북한군 품속에서 나온 사진들. 오른쪽 사진은 전사한 군인이 휴가를 나왔다가 여동생과 찍은 사진이다. NK인사이더

불과 몇 달 전만 하더라도 북한 당국은 러시아 파병 소식이 주민들 속에서 퍼지자 이를 유언비어로 규정하고 유포자 색출에 혈안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파병과 전사자 발생을 인정한 뒤엔 태도가 확 바뀐 것입니다. 앞으로는 이를 주민 교육 선전용 소재로 사용할 것입니다. 북한의 선전 방식은 상투적이죠. 주민들을 모아놓고 중앙에서 파견된 강사들이 이런 식으로 떠들 겁니다.“미제와 서방 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 우크라이나 괴뢰도당이 러시아 영토를 침범했다. 러시아가 곤경에 빠져 속수무책으로 밀리고 있을 때 일당백의 우리 특수병력이 전투에 참가해 단숨에 전세를 역전시켰다. 우리 군 한 개 소대만 나가도 우크라이나 괴뢰 한 개 대대가 겁에 질려 도망가기 급급했다.”

“세계 2위의 군사력을 가진 러시아도 미제 장비로 무장한 우크라이나에 고전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지원한 포와 포탄, 미사일이 도착하자 상황이 급반전했다. 눈을 단 것처럼 정확한 포탄과 미사일이 목표를 정확히 타격하자 미제는 조선의 군사기술과 장비가 러시아보다 더 뛰어날 줄은 몰랐다고 아우성쳤다. 러시아도 지금 세계에서 제일 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국가는 조선이라고 감탄하며 각종 장비를 다 보내달라고 손을 내밀고 사정하고 있다.”

실제 강연 내용은 더욱 황당할 겁니다. 북한의 내부 선전 강연 내용은 늘 저의 상상력보다 몇 발자국은 더 나갔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강군을 키워낸 김정은이 위대하다고 결론을 내고 침이 마르게 칭송할 겁니다.

우크라이나 드론에 발각된 북한군 병사의 모습. 수 초 뒤 이 병사는 드론 공격으로 사망했다. 텔레그램.

우크라이나 드론에 발각된 북한군 병사의 모습. 수 초 뒤 이 병사는 드론 공격으로 사망했다. 텔레그램.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우크라이나에서 최후의 순간까지 장군님을 그리며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졌다는 ‘영웅전사’들의 스토리가 쏟아져 나올 것이며, “이들의 뒤를 따라 제2의 OOO(영웅이라는 병사의 이름)이 되자”는 구호가 전국 각지의 생산현장과 학교들에 걸리겠죠.

그렇다면 북한 주민들은 저런 선전을 믿을까요. 안타깝지만, 아마 80%는 믿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세뇌가 먹히게끔 만들려고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폐쇄정책을 펴고 있는 것입니다.

주민들은 누군가의 아들딸들이 타향의 전쟁터에서 무주고혼이 된 것에 분노하지 않을까요. 당사자가 아닌 한 크게 분노할 사람도 많지 않을 듯합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탈북민들의 많은 증언을 통해 유추해보면 북한은 전쟁을 치르지 않는 나라 중 남성 사망률이 아마 최상위권일 겁니다. 매년 다른 나라라면 죽지 않아도 될 수 만 명의 남성이 국책 사업과 생계 현장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안전장비가 뒷전인 곳이라 큰 공사판이 벌어지면 기한을 맞추느라 어둠 속 야간작업에 내몰리다가 수십, 수백 명씩 죽어나갑니다. 각종 거리 건설이 벌어지는 평양에선 “올라간 아파트 층수만큼 사람이 죽는다”는 말이 정설이 된지 오랩니다. 이처럼 죽음이 예사로운 일이 된 북한에서 600명 정도의 사망은 ‘새 발의 피’ 정도라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전사한 군인에 대한 대우도 비난을 잠재우는데 적잖은 영향을 끼칩니다.

북한은 전투에서 전사한 군인의 가족에게 ‘전사증’이란 것을 발급합니다. 전사증은 김 씨 일가 초상화 다음으로 집에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는데, 이것은 “우리 가족은 이제 핵심계층으로 인정받았다”는 징표이기도 합니다.

북한에서 6.25전쟁 전사자 가족은 출신성분을 빨치산 가족 다음쯤으로 인정받습니다. 전사자의 부모나 형제, 자녀는 웬만하면 간부로 등용됩니다. 평양에는 핵심계층들이 모여 사는데, 잘 나가는 집안을 조사해보면 전사증이 한두 개씩은 나올 겁니다.

그런데 현재 빨치산 가족은 벌써 3대, 4대까지 내려오며 혈통의 ‘약발’이 떨어졌고, 6.25전쟁 전사자 가족도 2대, 3대쯤으로 내려와 힘이 빠졌습니다. 70년 넘게 하도 많은 숙청이 있다보니 가계 출신성분의 순수성도 많이 오염됐을 겁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 전사자 가족은 정말 오랜만에 배출된 ‘따근따끈한’ 신흥 핵심계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부모형제는 간부 등용에서 최우선 순위로 선발될 것이고, 자식이 있다면 만경대혁명학원에 보내 김정은을 옹위하는 핵심 요직에 발탁할 것입니다.

2022년 10월 만경대혁명학원을 찾은 김정은이 원아들과 함께 있는 모습. 북한 체제의 핵심 엘리트를 키워내는 만경대혁명학원은 북한 체제를 위해 공을 세우고 사망한 사람의 자녀만 입학하며, 김정은이 수시로 찾아가는 학교이기도 하다. 동아일보 DB

2022년 10월 만경대혁명학원을 찾은 김정은이 원아들과 함께 있는 모습. 북한 체제의 핵심 엘리트를 키워내는 만경대혁명학원은 북한 체제를 위해 공을 세우고 사망한 사람의 자녀만 입학하며, 김정은이 수시로 찾아가는 학교이기도 하다. 동아일보 DB

전사자 가족은 출신성분의 우대에 더해 공급의 우대도 받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배급을 주지 못해도 전사자 가족에겐 무조건 배급을 해줄 것입니다.

우크라이나 전사자 가족들에게 평양 거주 우선권을 부여한다는 말도 나오는데, 충분히 가능성이 높은 이야기입니다. 핵심계층이 됐는데, 당연히 평양에서 살아야죠.

평양 거주권은 ‘100만 달러짜리’라고 할 정도로 받기 어렵습니다. 평양 청년과 지방 청년이 결혼을 하면 남녀 상관없이 무조건 지방으로 내려 보낼 정도로 평양은 거주의 순수성을 고수합니다. 거주 이전의 자유가 당국의 허락 없이 이뤄질 수 없는 북한이니 원한다고 평양에서 살 수도 없는 것이죠.

그렇지만, 전사자가 600명이라면 이들 가족 정도는 얼마든지 평양에서 살 수 있게 할 수 있습니다. 김정은이 최근 건설한 5만 세대 살림집 중 일부만 내주어도 주택 문제는 해결됩니다. 어쩌면 부상자 가족도 ‘공로’에 따라 평양이나 대도시로 이주를 허용할지 모릅니다.

김정은은 평양에 전사자들을 기리는 전투위훈비가 건립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위훈비는 평양시 서성구역 연못동에 있는 ‘조국해방전쟁 참전열사묘’에 건립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평양시 서성구역에 위치한 ‘조국해방전쟁 참전열사묘’ . 체제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는 공간으로 활용된다. 동아일보 DB

평양시 서성구역에 위치한 ‘조국해방전쟁 참전열사묘’ . 체제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는 공간으로 활용된다. 동아일보 DB

2013년 김정은의 지시에 의해 만들어진 열사묘는 ‘인민군열사추모탑’을 중심으로 600개 이상의 묘가 자리 잡고 있는데, 꼭 6.25전쟁에서 죽지 않아도 안장이 됩니다. 베트남 전쟁에 파병됐다 전사한 공군 조종사 27명,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당시 전사한 공비 25명 중 24명도 여기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열사묘 주변의 공터도 많아 얼마든지 확장할 수 있습니다.

‘인민군열사묘’는 지난달 김정은의 참석 하에 성대하게 열린 화성지구 3단계 거리와 도보로 30분 이내에 위치해 있습니다. 3단계 아파트 1만 세대 중 우크라이나 전사자 가족에게 600세대 정도는 얼마든지 공급할 수 있을 겁니다. 유족들이 기념일마다 혈육의 묘를 찾아 참배하고 이들처럼 목숨 바쳐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하는 모습은 북한 당국에게도 나쁘지 않는 ‘그림’일 겁니다.

북한이 지난달 준공식을 진행한 화성지구 3단계 거리 전경. 1만 세대의 아파트가 건설됐다. 동아일보 DB

북한이 지난달 준공식을 진행한 화성지구 3단계 거리 전경. 1만 세대의 아파트가 건설됐다. 동아일보 DB

평양에 아파트도 주고, 가족에게 출세를 보장해주며 특별 공급까지 해주니 북한 사람들의 시각에서 볼 때는 전사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이뤄지는 것이죠. 건설현장 등에 내몰렸다가 사고로 사망한 사람들의 가족은 “차라리 우크라이나에 가서 죽지”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을 겁니다. 또 세뇌와 별도로 전장에 나간 북한 청년들에게도 목숨을 내걸 동기부여도 어느 정도 생기는 것입니다.

북한은 비판받아 마땅한 정책들이 넘쳐납니다. 하지만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체제를 위한 희생에 들이는 보상은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래야 충성을 짜낼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북한보다 훨씬 잘 사는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2010년 천안함 폭침 사건 전사자 유족들은 2억~3억600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고, 2002년 제2연평해전 전사자 6명은 3000만~6000만원 수준의 보상금을 받았다가 나중에 1억4400만 원~1억8400만 원의 보상금을 추가로 받았습니다. 이 보상금으론 서울에 방 한 칸 구입하기도 어렵습니다. 사고로 사망하나 영웅적으로 전사하나 별 차이가 없고, 취직이나 공급의 특혜도 없습니다.

사용도 하지 않는 지방 공항이나 도로 등에 수천 억, 수조 원씩 낭비하는 우리가 나라를 위한 희생에는 너무나 짠 것이 아닐까 돌아봐야 합니다. 대한민국이 공동체에 대한 희생과 헌신에 최고의 예우와 보상이 이뤄지는 나라로 세계적인 인정을 받는 날이 올 수 있을까요.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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