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 수의대에 도입된 ‘펫 앰뷸런스’ 살펴보니
마취에서 깨어난 ‘환자’의 호흡이 가빴다. 기침이 멎질 않았다. 거친 숨소리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위태로웠다. 지난해 12월 26일 서울 중구 을지로에 있는 한 종양 센터에서 자기공명영상(MRI) 검사를 받은 직후 상태가 급격히 악화됐다.오연성 폐렴이라고 했다. 위에 남아있던 음식물이 마취 중 기도로 넘어가 폐에 염증을 일으킨 탓이다. 센터는 당장 입원이 가능한 24시간 병원으로 환자를 옮길 것을 권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건국대에서 진료받았던 기억이 순간적으로 떠오른 것이 천운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번호를 눌렀다.
“위급 상황인가요? 앰뷸런스를 보내겠습니다.”보호자 배모 씨(40)는 하얀 가운을 입고 나타난 의사가 마치 구세주와 같았다고 회상했다. 환자는 병원으로 이동하는 앰뷸런스 안에서 산소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았다. 의사는 수시로 바이털 사인을 체크하며 환자의 상태를 살폈다. 신속한 조치를 받은 덕에 염증 수치가 빠르게 떨어졌다. 8년생 포메라니안 ‘진주’는 그렇게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그간 위급한 반려동물 환자를 이송하는 수단은 자차나 택시가 유일했다. 이동 중에 환자 상태가 악화해도 대처할 방법이 없다 보니 사망하는 사례가 잦았다.
현대자동차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2022년 건국대에 국내 최초의 ‘펫 앰뷸런스’를 기증했다. 지난해 10월에는 경북대가 두 번째 펫 앰뷸런스를 인수했다. 2호 펫 앰뷸런스는 이르면 다음 달부터 작은 생명들을 구하는 일에 본격 투입될 예정이다.
● 환자 안정화 초점 맞춘 ‘움직이는 동물병원’20일 오후 대구 북구 경북대 수의과대 부속 동물병원 앞. 귀여운 강아지 모습을 커다랗게 그려 넣은 흰색 차량 한 대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구급차를 닮았지만 사이렌은 달려 있지 않았다. 이 앰뷸런스의 주요 고객은 강아지, 고양이와 같은 반려동물이다.박스 형태의 탑차 내부는 작은 진료실을 연상케 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진료를 위해 마련된 허리 높이의 처치대였다. 처치대 좌측에 있는 모니터는 심박수, 혈압, 산소포화도와 같은 환자 정보를 실시간으로 보여줬다.
처치대 아래 공간은 산소 케이지로 활용된다. 이 케이지는 내부 산소 농도뿐만 아니라 온도까지 조절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쪽 벽면을 차지한 수액 펌프와 주사 장치는 환자의 무게에 따라 정량의 약물이 투입될 수 있도록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이동용 조명 장치와 환기를 위한 공조 장치도 설치돼 응급의학 전담 수의사의 원활한 진료를 돕는다.
이 밖에도 환자 상황에 따라 추가로 차량에 실을 수 있는 의료 장비들을 구비했다. 심정지가 발생한 반려동물에게 필수적인 제세동기를 비롯해 쇼크 및 호흡기 질환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는 데 활용되는 혈액가스 분석기, 휴대용 엑스레이 등이 대표적이다.
일반 앰뷸런스의 주 역할이 ‘환자의 신속하고 안전한 이송’이라면 펫 앰뷸런스는 ‘초기 대응과 환자 안정화’에 초점을 두고 있다. 구윤회 경북대 수의학과 교수는 “스스로 증상을 말할 수 없는 동물들의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고성능 의료 장비들의 역할이 중요하다”며 “움직이는 동물병원을 만들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대형견 탈 넓은 공간-소음 예민한 동물도 ‘OK’
펫 앰뷸런스 제작 과정에서의 첫 걸림돌은 참고할 대상이 없다는 점이었다. 당시 상용화된 모델이나 정해진 규격이 없었다. 이에 구 교수는 앰뷸런스 설계 단계부터 직접 나섰다. 줄자를 들고 차량 내부를 측정했고 설계 도면을 그려 회사에 전달했다. 의료 장비 종류부터 수납장 방향과 같은 세부적인 부분까지 현대차와 논의하는 과정을 거친 덕에 맞춤형 펫 앰뷸런스가 탄생할 수 있었다.특히 2호 펫 앰뷸런스는 현대차그룹 최초의 목적기반모빌리티(PBV) 모델 ‘ST1’에 기반해 만들어졌다. 전기차인 ST1은 기존 내연기관차와 달리 엔진, 변속기, 연료 탱크 등과 같은 부피가 큰 부품들이 필요하지 않다. 주요 부품 중 하나인 배터리를 평평한 형태로 제작해 바닥에 배치할 수 있어 스케이트보드 형태의 플랫폼 위에 목적에 맞는 차체를 얹을 수 있는 것이 큰 장점이다. 이 때문에 대형견이 탈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실내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고, 부피가 큰 의료장비들도 무리 없이 장착할 수 있게 됐다.
엔진 소음이 없기 때문에 얻는 장점도 있다. 일반적으로 강아지, 고양이와 같은 동물들은 소음에 예민한 경우가 많다. 차량으로 이송하는 과정에서 쉽게 흥분하며 진정시키기도 쉽지 않다. 구 교수는 “과거 심장이 빨리 뛰면 폐에 물이 차는 질환인 ‘이첨판폐쇄부전증’을 앓는 몰티즈 환자가 있었다”며 “차를 타고 이동하면 몹시 흥분하는 탓에 치료가 끝난 후에도 매번 집에 돌아가는 길에 상태가 악화되곤 했다”고 말했다.
전기차인 펫 앰뷸런스는 소음이 적어 동물이 탑승 시 상대적으로 불안감을 덜 느낄 뿐만 아니라 외부 전력을 끌어다 쓸 수 있어 장기간 의료 조치를 할 때도 용이하다.
● 애견 행사 출장부터 ‘헌혈카’ 역할까지 수행 기대
경북대 펫 앰뷸런스는 이르면 다음 달부터 본격적인 운행을 시작한다. 경북대 동물병원은 아직 응급의학 전공 수의사 인력이 부족한 만큼 단기적으로는 위급 상황이 확실한 병원 간 ‘전원’ 환자를 대상으로 펫 앰뷸런스 운영을 시작할 계획이다. 단계적으로 범위를 확장해 향후 일반 개인 환자들의 요청에도 출동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운영 시간의 경우 초기에는 일반 진료 시간(오전 9시~오후 6시)에 한정하지만, 시스템이 자리 잡고 응급의학 전공 수의사 인력이 확충되면 장기적으로는 24시간까지 확대할 예정이다. 운영 지역도 대구에서 경북까지 넓히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구 교수는 펫 앰뷸런스의 향후 방향성에 대해 “펫 앰뷸런스를 필두로 반려동물 응급의료 네트워크가 전국적으로 형성됐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지역별로 반려동물 응급의료 인프라와 네트워크가 활성화된다면 반려동물 응급 환자들의 장거리 이송도 원활해질 것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이를 위해선 산재해 있는 일선 동물병원의 응급의료 체계를 정리하는 것이 우선”이라며 “권역별로 나뉘어 환자를 상대할 수 있도록 하나로 통합된 중앙 조직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반려동물 시장이 나날이 성장하고 있는 가운데 펫 앰뷸런스는 다방면에서 활용 방안이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예컨대 애견 행사가 열리는 곳에 출동해 응급사고를 방지하는 역할도 가능하다. 일사병에 노출된 반려동물들에게 빠르게 수액을 투여하는 식이다.
펫 앰뷸런스는 반려견 헌혈 문화 확산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현대차는 앞서 건국대와 경북대에 펫 앰뷸런스를 기증하면서 각 대학에 ‘아임도그너 헌혈센터’도 함께 개소했다. 반려견 혈액 공급 체계에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반영한 결과다. 현재 국내 반려견 수혈용 혈액의 대부분은 수혈을 위해 사육되는 공혈견으로부터 공급되고 있다.
펫 앰뷸런스는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고자 ‘찾아가는 반려견 헌혈카’ 역할도 수행할 예정이다. 배슬기 건국대 수의학과 교수는 “반려견 보호자가 헌혈을 희망하더라도 대형견을 병원까지 데리고 오는 일이 쉽지 않다”며 “미래에는 헌혈 시설을 갖춘 펫 앰뷸런스가 방문하기 쉬운 장소까지 직접 이동해 헌혈 캠페인을 진행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대구=한종호 기자 hj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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