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최정훈 기자] 국내 치매 환자나 의사결정 능력을 상실한 고령자가 보유한 이른바 ‘치매 머니’는 154조원에 달한다. 그러나 이를 안전하게 관리할 제도적 기반은 여전히 부실하다. 일부 은행권은 고령층 대상 신탁상품을 출시하고 있지만, 사실상 예·적금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관련 입법은 물론 치매 머니를 활성화할 정부 차원의 지원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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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일환 기자] |
은행권 신탁 상품, 사실상 예·적금 수준
19일 금융권과 정부에 따르면 치매 신탁 제도는 2020년 금융당국의 활성화 방안 발표 이후 5년간 입법이 없는데다 논의조차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조사한 결과 지난 2023년 기준 국내 65세 이상 고령 인구 중 치매 환자는 약 90만명으로, 이들이 보유한 금융자산은 154조원 규모로 추산했다. 금융사기 피해 위험이 크고, 의사능력 상실로 본인이 보유한 자산의 운용이 사실상 중단되면서 사회적·경제적 손실로 이어지는 상황이다. 자산을 제3자가 대리로 안전하게 운용·보호할 수 있도록 설계한 ‘치매 신탁’ 제도는 걸음마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치매 신탁 논의는 금융위원회가 지난 2020년 발표한 ‘고령친화 금융환경 조성 방안’에서 처음 언급됐다. 당시 금융위는 치매 특화 신탁사 설립, 소극재산(채무, 세금 등) 수탁 허용, 후견제도와 연계한 치매 신탁 활성화 등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그러나 실제로 도입된 제도는 전무하다. 금융위 관계자는 “당시에는 정책적 관심이 있었지만 이후 코로나19와 다른 우선 과제에 밀려 본격적인 추진은 이뤄지지 않았다”며 “이제라도 다시 검토할 계획이다”고 설명했다.
금융권에 일부 상품이 있지만 유명무실한 수준이다. 하나은행은 ‘100년 안심신탁’, ‘100세 신탁’ 등을 내놨지만 고객이 직접 설계해 위탁하고 관리하는 방식이라 치매와 같은 의사능력 상실자 보호에는 한계가 있다. 또 현재 신탁법상 ‘소극재산’은 수탁대상에서 제외돼 있어 치매 고령자가 부채나 세금 등까지 포함해 종합적으로 자산을 설계하는 데에는 제약이 크다. 시장에선 부동산·예금 외에도 생활비, 병원비 같은 지출까지 관리할 수 있어야 실질적인 ‘치매 신탁’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은행권 외부 중립적 전문기관 필요”
일본은 신탁은행이 아닌 민간 법인을 중심으로 치매 신탁을 수행하는 ‘특화 신탁사’를 도입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선 유사한 논의만 있었을 뿐 실제 설립 사례는 없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치매 상태에 빠진 고객의 자산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려면 은행권 외부의 중립적 전문기관이 필요하다”며 “현행법 제도는 이런 수요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후견제도와 연계된 ‘후견지원신탁’, ‘생전신탁’ 등의 확대도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복잡한 법적 요건과 미비한 제도 인프라로 시장 자체가 없다.
치매 신탁 논의가 다시 떠오른 것은 최근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올해 안에 제도 개선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히면서다. 그러나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이 복지 공약에만 집중하면 치매 머니 관리 같은 세부 정책은 또다시 후순위로 밀릴 수 있다고 우려한다.
실제 과거에도 치매 관련 신탁제도는 수차례 발표만 있었을 뿐 실질적 입법은 이뤄지지 못했다. 금융권 관계자는 “치매 신탁은 고령화로 생기는 가족 갈등과 국가 복지비용 부담을 동시에 줄일 수 있는 수단이다”며 “치매 신탁은 단순한 복지 보완책이 아닌 고령 사회에 대응하는 핵심 금융 인프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