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흔한 은방울꽃은 어떻게 럭셔리의 상징이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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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는 3개월마다 계절이 바뀐다. 보통 3월 20일에 봄이 시작된다. 6월 21일부터 여름, 9월 22일부터 가을, 12월 21일부터 공식적으로 겨울을 맞이한다.

올해도 예외 없이 3월 20일에 봄이 왔다. 이날부터 길고 음산했던 겨울을 뒤로하고 어느덧 봄기운이 완연해졌다. 유럽의 에너지 절약 정책에 따라 서머타임(일광 절약 시간제: 국가의 표준시를 원래 시간보다 한 시간 앞당겨 사용하는 것)이 시작돼 낮이 점점 길어진다.

'4월에는 실오라기 하나도 걷어내면 안 되고 5월에는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라는 프랑스 속담이 있다. 4월에는 날씨가 변덕스러워 아무리 온도가 높고 날씨가 좋아도 방심하면 감기에 걸릴 수 있지만, 5월에는 비로써 완연한 봄이 왔기 때문에 마음 놓고 가벼운 옷을 입어도 된다는 의미이다.

봄과 행운을 전하는 은방울꽃의 전설

프랑스의 봄은 4월의 은방울꽃과 함께 찾아온다.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의미에서 5월 1일 노동절에 은방울꽃, 뮤게(muguet)를 주고받는 오랜 관습이 있다. 노동절과 은방울꽃이 연계된 것은 사회주의자들의 심벌이었던 야생 장미가 5월에 만개하는 은방울꽃으로 대체 되면서부터이다.

19세기 덴마크 화가 Johan Laurentz Jensen의 작품 <은방울꽃과 용담꽃> / 그림출처. © Nivaagaard Museum

19세기 덴마크 화가 Johan Laurentz Jensen의 작품 <은방울꽃과 용담꽃> / 그림출처. © Nivaagaard Museum

은방울꽃으로 행운을 기원하는 이 전통은 르네상스 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나, 그 근원은 확실하지는 않다. 1561년 10살의 어린 나이에 프랑스 왕이 된 샤를 9세가 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치와 드롬(Drôme) 지역을 방문하는 동안 성의 정원에 핀 은방울꽃을 선물 받았다. 왕은 이에 감동하여 이듬해 은방울꽃을 궁정의 여성들에게 선사하기 시작했고, 프랑스 전역에 유행처럼 퍼져나가 5월 1일 은방울꽃을 선사하는 풍습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모든 꽃과 마찬가지로 은방울꽃에도 많은 전설이 담겨 있다.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 흘린 눈물이 떨어져 꽃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성모 마리아가 십자가 아래에서 흘린 눈물에서 피어난 꽃이 은방울꽃이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폴로 신은 자신의 아홉 뮤즈의 연약한 발을 보호하기 위해 은방울꽃으로 땅을 덮어주었고 기독교 전설에 따르면 용과의 전투에서 이긴 레오나르도 성인(Saint Leonard)이 숲속에서 흘린 핏방울이 은방울꽃의 기원이 되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또한 불운의 숫자인 13은 은방울꽃에게는 행운의 숫자이다. 은방울꽃은 가지 하나에 보통 7~11개의 꽃이 달려있다. 하얀 은방울이 13개 달린 가지는 네잎클로버처럼 큰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한다.

“틀림없이 행복해진다” 은방울꽃 꽃말

순결과 행운을 상징하는 은방울꽃 장식은 축하 행사, 특히 결혼식에 많이 사용된다. 중세 시대에 5월은 결혼식이 거행되는 달로, 전통적으로 은방울꽃 꽃다발을 사랑하는 사람의 문에 걸어두었다고 한다.

은방울꽃 부케는 20세기에 들어서도 사랑받고 있으며 특히 로열패밀리의 결혼식 부케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모나코의 그레이스 켈리 공비, 영국 왕세자비 케이트 미틀턴 그리고 룩셈부르크의 알렉산드라 공주 모두 4월에 결혼식을 올려 막 피어난 은방울꽃을 부케로 선택하였다.

1957년 개봉된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미국 뮤지컬 영화 화니 페이스(Fanny Face)에서 오드리 헵번도 은방울꽃 부케를 들고 결혼식을 올린다. 한국에서도 유명 여자 연예인들이 결혼식을 위해 은방울꽃을 구하려고 비싸게 외국에서까지 공수하는 경우가 있어 이슈가 되기도 하였다.

[좌] 모나코의 그레이스 켈리 공비 (1956) / 사진출처. © Mondadori Portfolio / Getty Images  
[우] 영화 'Funny Face'에서 지방시 웨딩드레스 & 은방울꽃 부케를 든 오드리 헵번 (1957) / 사진출처. ©Paramount Pictures

[좌] 모나코의 그레이스 켈리 공비 (1956) / 사진출처. © Mondadori Portfolio / Getty Images [우] 영화 'Funny Face'에서 지방시 웨딩드레스 & 은방울꽃 부케를 든 오드리 헵번 (1957) / 사진출처. ©Paramount Pictures

럭셔리한 명품 은방울꽃

은방울꽃은 여린 모습과는 달리 영하 25도의 혹한 추위에도 강하고 키우는 데 손이 많이 가지 않는다. 혼자 잘 자라는 구근 식물로 프랑스 지방 곳곳에 흔하게 피는 야생 봄꽃이지만, 독특하고 은은한 향기와 작지만 완벽한 꽃 모양으로 럭셔리 브랜드들의 상징이 되었다.

크리스찬 디올(Christian Dior)은 어린 시절 노르망디 정원의 꽃들을 추억하며 은방울꽃을 디올의 심벌로 만들었다. 크리스찬 디올은 양복 깃 단춧구멍에 은방울꽃을 꽂고 다니며, 매년 5월 1일에 은방울꽃을 직원들과 고객들에게 선물하곤 했다.

1987년 디올 창립 40주년을 기념하여 파리 디올 플래그십 스토어 건물 외관을 거대한 은방울꽃 가지로 장식하였고, 2022년 매장 리뉴얼 후 재오픈을 기념하기 위해 고객들에게 은방울꽃을 선물하기도 했다.

디올 홈웨어 컬렉션의 대표적인 'Lily of the Valley' 라인은 은방울꽃에 대한 오마주로 식탁의 즐거운 나눔의 순간을 약속한다. 디올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 크림으로 예쁜 은방울꽃을 그려주기도 한다.

[좌] 디올 메종, 홈 웨어 라인의 컬렉션, 은방울꽃 디자인 / 사진출처. © Ines Manai/Dior  
[우] 디올 카페 / 사진. © 정연아

[좌] 디올 메종, 홈 웨어 라인의 컬렉션, 은방울꽃 디자인 / 사진출처. © Ines Manai/Dior [우] 디올 카페 / 사진. © 정연아

디올의 컬렉션에서도 은방울꽃의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954년 여름 컬렉션은 은방울꽃을 테마로 했으며, 1957년에는 디올의 대표적인 드레스 중 하나가 된 은방울꽃 드레스가 탄생했다. 1960년대 초반 디오르의 수석 디자이너였던 마크 보앙(Marc Bohan)은 '보뇌르(Bonheur·행복)'라는 이름의 웨딩드레스 허리에 은방울꽃을 꽂기도 했다.

존 갈리아노(John Galliano)의 은방울꽃 모양의 XXL 브로치도 인상적이며 지금도 디오르 남성 컬렉션, 주얼리 컬렉션에서 은방울꽃 모티브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좌] 디올 뮤게(Muget, 은방울꽃) 컬렉션, 비엔나(Vienne) 정장 (1954) / 사진출처. © Meager/Fox Photos/Getty Images  
[우] 디올 은방울꽃 드레스, Libre Line 컬렉션 (1957) / 사진출처. La Galerie Dior 사이트

[좌] 디올 뮤게(Muget, 은방울꽃) 컬렉션, 비엔나(Vienne) 정장 (1954) / 사진출처. © Meager/Fox Photos/Getty Images [우] 디올 은방울꽃 드레스, Libre Line 컬렉션 (1957) / 사진출처. La Galerie Dior 사이트

[좌] 2007 디오르 겨울 컬렉션 런웨이, 존 갈리아노 디자이너의 작품, 모델 지젤 번천(Gisele Bündchen) / 사진출처. © Toni Anne Barson Archive / Getty Images  
[우] 조각가 다니엘 아샴(Daniel Arsham)이 디자인한 디올 은방울꽃 브로치 / 사진. © Photographie Alfredo

[좌] 2007 디오르 겨울 컬렉션 런웨이, 존 갈리아노 디자이너의 작품, 모델 지젤 번천(Gisele Bündchen) / 사진출처. © Toni Anne Barson Archive / Getty Images [우] 조각가 다니엘 아샴(Daniel Arsham)이 디자인한 디올 은방울꽃 브로치 / 사진. © Photographie Alfredo

은방울꽃의 향기는 상큼함과 세련미가 넘쳐 고급 향수에 주로 사용된다. 은방울꽃의 향기는 재현이 어렵고 꽃이 너무 작아서 향 추출이 비효율적이다. 조향을 해도 똑같은 향을 얻을 수 없어 보통 다른 꽃 향들과 합성해 제조한다.

1956년 출시된 디올리시모(Diorissimo) 향수는 크리스찬 디올이 향수병을 직접 디자인하고 재스민, 5월의 장미, 일랑일랑 등이 어울려져 싱그러운 은방울꽃 향을 재현하였다.

디올 은방울꽃 향의 디올리시모 향수, 바카라 크리스털 향수병 (1956) / 사진출처. © Laziz Hamani / Galerie Dior 사이트

디올 은방울꽃 향의 디올리시모 향수, 바카라 크리스털 향수병 (1956) / 사진출처. © Laziz Hamani / Galerie Dior 사이트

특히 메종 겔랑(Gurlain)은 은방울꽃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뮤게(Muguet, 은방울꽃) 향수를 매년 봄 한정판으로 5000개 출시하고 있다.

뮤게 향수병은 1853년 겔랑의 창설자 피에르 프랑수아 파스칼 겔랑(Pierre-François-Pascal Guerlain)이 나폴레옹 3세와 외제니 황후의 결혼식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다. 꿀벌 모티브가 새겨진 아베이(Abeille·벌) 향수병을 사용한다. 겔랑은 새로운 뮤게 향수를 위하여 매년 금속 장인이나 도자기 장인, 조각가들과 협업으로 아베이 향수병에 은방울꽃의 새 옷을 입혀준다.

나폴레옹 3세의 아내 외제니 황후와 아베이 향수병 / 사진출처. © Pierre Coudert / Guerlain 공식 사이트

나폴레옹 3세의 아내 외제니 황후와 아베이 향수병 / 사진출처. © Pierre Coudert / Guerlain 공식 사이트

2025년에는 디지털 이미지 크리에이터인 얀 필립(Yanne Philippe)이 AI를 이용해 꽃은 진주로 형상화하고 아르누보 스타일의 아라베스크 줄기는 18K 도금으로 처리해 섬세하고 세련된 현대적인 아베이 향수병을 탄생시켰다.

2024년에는 조각가 안느 로페즈(Anne Lopez)가 금방 꺾은 것 같은 하얀 은방울꽃에 금 22K를 입혀 장식했고, 2023년에는 도자기 장인인 카렌 스와미(karen swami)가 하얀 세라믹 은방울꽃을 만들고 아틀리에 베르몽(Atelier Vermont)에서 제작한 프랑스 자수 리본으로 장식했다.

[좌측부터] 한정판 뮤게(Muguet, 은방울) 향수(2023), 한정판 뮤게 향수(2024), 한정판 뮤게 향수(2025) / 사진출처. Guerlain 공식 사이트

[좌측부터] 한정판 뮤게(Muguet, 은방울) 향수(2023), 한정판 뮤게 향수(2024), 한정판 뮤게 향수(2025) / 사진출처. Guerlain 공식 사이트

사랑, 행운, 행복, 삶, 새로움, 순결 그리고 즐거움을 상징하는 은방울꽃은 앙증맞은 작은 꽃모습과 좋은 향으로 유명하지만, 식물 전체가 맹독성을 갖고 있다. 심지어 은방울꽃을 꽂아둔 화병의 물도 독성을 가지고 있어 어린아이들과 애완동물들의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정연아 패션&라이프스타일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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