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 공부하려니까 힘드네요. 이 시간만 되면 졸음이 자꾸 쏟아져서요. 그래도 내 밥벌이 내가 해야지, 자식한테 손 벌리면 안 되잖아요."
11일 오후 1시께 서울 용산구 서울특별시교육청 남산도서관 5층 열람실 앞에서 만난 김병훈(52) 씨는 건설안전기사 시험을 준비 중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지난해 퇴직한 김 씨는 매일 아침 이곳 도서관으로 출근한다.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한 김 씨는 "기사 시험공부 하면서 동시에 이력서도 써야 하니 마음에 여유가 없다"며 "그래도 도서관 오면 나 같은 아저씨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있으니 경쟁심도 들고 집중이 잘 된다"고 말했다.
최근 고용 불안에 시달리거나 퇴직한 중장년층이 재취업을 위해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19년부터 2023년까지 50대 국가기술자격 필기시험 응시자는 연평균 9.2% 증가했다. 이 기간 전체 수험인원이 평균 1.7% 증가한 것과 대조되는 수치다.
한국고용정보원의 고용행정통계에 따르면, 올해 1월 60대 이상의 신규 구직 건수는 13만8700건(전체 구직건수의 29%)으로, 20대의 10만1234건(21%)보다도 많았다.
◆평일 도서관 가보니…자격증 공부하는 '수험생 아빠' 빽빽
이날 이 도서관을 채운 사람 대부분도 대학생이나 청년 취업 준비생보다는 중장년층이 많았다. 오후 1시 30분께 남산도서관 5층 열람실에는 열띤 학습 분위기가 감돌았다. 3주도 채 남지 않은 산업안전지도사 1차 시험을 앞두고, A씨(53)는 연습장에 빽빽하게 글씨를 적어가며 암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A씨는 조금이라도 공부 시간을 늘리기 위해 화장실에 갈 때도 연습장을 들고 갈 정도다. 그는 열람실 로비에서 "시간이 없어 길게 인터뷰할 수 없다"며 "내 딸이 대학교 2학년인데, 우리 딸보다 내가 더 공부 열심히 하는 것 같다"며 서둘러 열람실로 향했다.
테라스에서 바람을 쐬던 중소기업 재직자 이건영(47) 씨는 손해평가사 시험을 준비 중이다. 이날 연차를 쓰고 도서관에 왔다는 이 씨는 "요즘 회사 사정이 어렵다 보니까 정년 보장이 안 될 게 뻔해서 자격증 준비를 하게 됐다"며 "합격하면 그래도 믿을 구석이 생기는 것이니 몸은 힘들지만 퇴근 후에도 열심히 공부한다"고 했다.
도서관에서는 은퇴 후 여행이나 휴식을 즐기기보다, 100세 시대를 대비해 자기 계발에 힘쓰는 중장년층도 만날 수 있었다. 금융업에 종사했다는 B씨는 "작년에 은퇴했다. 시간이 많아지니 친구들과 등산을 갈 수도 있고 모임을 늘일 수 있지만, 더 나이가 들면 일자리를 구하기도 더 어려울까 봐 도서관에 와서 자격증 공부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솔직히 은퇴하면 마음이 편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집에서 쉬려니까 마음이 불편했다"며 "내 인생 누가 대신 살아주는 거 아니지 않나. 준비할 수 있을 때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은퇴 이후의 삶을 걱정하는 중장년층은 자격증 공부는 물론 함께 주식이나 부동산 등 재태크 공부에도 열중하는 모습이었다. 재취업을 위해 토익 학원에 다니고 있다는 박기정(46) 씨는 이날 주식 도서 2권을 대출했다. 그는 "재취업이 워낙 어렵지 않나. 주식 공부의 필요성을 요즘 크게 느끼고 있다"며 "공부해놓으면 어떻게든 도움이 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이날 만난 도서관 인문사회과학실 사서는 "40~50대분들은 특히 재테크 관련 도서를 많이 대출해 간다"며 "도서관에 구비해 둘 책에 대한 수요조사도 진행하는데 이분들은 대부분 재테크 관련 도서를 신청하더라. 노후를 대비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고 설명했다.
◆ 전문가 "인생 제 2막 살아야 한다는 판단과 사회적 압력 동시 작용"
전문가들은 중장년층의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은퇴 이후에도 자녀에게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고자 하는 욕구에 따른 것이라고 평가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평균 수명이 길어지다 보니 은퇴 이후에도 안정적인 삶을 위해 중장년층이 지속해서 자기 계발에 힘쓸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구 교수는 "점점 정년 연장을 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나타나고 재고용에 대한 논의가 지속되고 있다"면서 "자격증 취득을 통해 재취업해 인생의 제2막을 살아야 한다는 스스로 판단 및 사회적 압력이 동시에 있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정부가 정년 연장안을 들고나왔는데 이러한 변화를 가속하는 게 필요하다"면서도 "젊은 세대와 중장년 세대의 일자리 경쟁이 심화해 한쪽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민형 한경닷컴 기자 mean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