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깎아낸 듯 거친 표면이 그대로 드러난 나무판 위에 초현실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기둥처럼 솟아오른 땅 덩어리 하나에 집 하나. 다섯 채의 집이 있지만 서로 다른 땅에 놓여 있어 서로 왕래할 수는 없다. 똑같은 굴뚝에서 하늘을 향해 똑같은 잿빛 연기만 뿜어낼 뿐이다. 조각가 이종빈(1954~2018)의 평면 작품 ‘독립가옥들이 있는 풍경’(1992)이다. 작가의 초월적 상상은 인간과 인간은 단절되고, 그런 인간들이 모여 환경을 파괴하는 지금의 모습과 어딘가 닮았다.
끊임없는 조형적·개념적 실험으로 기존 예술의 틀을 깨고자 했던 이종빈 작가의 대규모 회고전 ‘무거운 스케치북’이 오는 11일부터 25일까지 서울 중구 명동 금산갤러리와 서울 종로구 인사동 동산방화랑에서 열린다. 작가의 드로잉, 회화, 조각 등 작품 120여 점을 양쪽에서 나눠 전시한다. 전시 제목인 ‘무거운 스케치북’은 작가가 스케치북 모양으로 제작한 1997년 조각 작품의 제목이기도 하다. 작가의 창작 철학과 조각 작품의 근본적인 아이디어가 항상 드로잉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 작가는 뇌종양 진단 후 5년이 넘는 투병 끝에 지난 2018년 향년 64세의 나이로 작고했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아내인 나화주 씨가 생전에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갤러리 문을 두드리면서 진행됐다. 나 씨는 “(조각가지만) 평소 드로잉을 많이 했기 때문에 아플 때도 드로잉전을 한 번 하고 싶어 했다”며 “그때는 간병을 하면서 해드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남편이 소천할 때 꼭 드로잉전을 열어드리겠다 약속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드로잉만 수십 점을 보실 수 있다”고 밝혔다.
전시는 생전에 한국 현대 조각의 선구자로 왕성하게 작업했던 이 작가의 여정을 재조명한다.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탐구와 사유를 바탕으로 한 그의 독창적인 시도를 엿볼 수 있다. 인간의 모습을 극적으로 변형한 조각 작품 ‘왜곡(Distortion)’(1997)과 드로잉 작품 ‘드로잉 1982-1983’ 등이 대표적이다. 인간 내면의 복잡한 감정과 개인사에 얽힌 소서사를 위트 있게 풀어낸 회화 작품 ‘2000-2002’도 눈길을 끈다. 그림엔 전시장 벽면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 조각상이 등장하는데, 얼굴은 사람이지만 몸은 꼬리가 달린 동물의 형상인데 다리는 셋이다.
이 작가는 홍익대 미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후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났다. 1983년 로마 국립미술아카데미 조각과를 졸업한 이후 1988년 카라라 국립아카데미 조각과를 졸업했다. 이후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던 그는 1990년부터 홍익대 조소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2003~2017년 경희대 교수로 재직했다.
황달성 금산갤러리 대표는 이 작가와 부산 경남고 동문이자 1년 후배로 생전에 작가의 개인전을 1997년과 2002년 두 차례 열기도 했다. 황 대표는 “이 작가는 이탈리아 유학을 끝내고 귀국해 1993년 서화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으로 화단에 충격을 줬다. 이후 박여숙 갤러리 등에서 전시를 이어가면서 작품 판매도 잘 돼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고 전했다. 박우홍 동산방화랑 대표는 “이 작가는 1990년대 촉망 받던 작가였는데 짧은 활동으로 잊혀지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