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동대문에서 패션 장사로 성공하긴 어려울 것 같아요.” 지난 12일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인근 한 패션상가에서 8년째 일하고 있다는 박모 씨는 최근 상황에 대해 이 같이 말했다. 그는 “코로나19 때 줄어든 손님들이 회복되지도 못했는데 중국 저가 의류들이 밀고 들어오면서 더 힘들어졌다. 알리나 테무 같은 곳의 값싼 옷들하고는 가격경쟁력에서 상대가 안 된다”고 하소연했다.
실제 5개 층으로 이뤄진 이 상가는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공실이 눈에 띄게 늘었다. 밤에만 영업하는 주변 패션상가들과 달리 이곳은 주·야간 모두 영업을 해왔지만, 낮 시간대에는 직원을 두지 않고 '무인 운영'을 택한 점포가 늘었다. 장사가 안 돼 인건비를 감당할 수 없어서다. 매장 입구엔 ‘문의는 전화 주세요’라고 적힌 팻말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상인회와 건물주는 자구책으로 지난해 12월부터 임대료를 10% 감면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전국 각지의 소매상들로 북적여야 할 저녁 시간대에도 천막을 두른 채 영업 개시를 하지 않는 매장도 많았다.
한때 ‘K패션의 메카’로 전성기를 누렸던 서울 동대문의 의류 제작 생태계가 무너지고 있다. 온라인으로 소비 수요가 빠져나간 데다 초저가를 앞세운 중국 이커머스(전자상거래) 기업들 공세가 겹쳤다. 알리익스프레스와 테무에 이어 최근엔 징동닷컴까지 국내 시장에 진출하면서 C커머스(중국 이커머스) 업체들의 영향력은 더 커질 전망. 유행을 빠르게 반영하는 속도와 가격을 무기로 성장한 동대문 상권은 같은 전략을 쓰되 더 저렴한 중국 업체들에 주도권을 내주면서 구조적 위기에 직면했다. 유행을 빠르게 모방해 공급하는 기존 방식으로는 중국 기업과의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알리·테무에 징동까지..커지는 C커머스 공습
14일 업계에 따르면 징동닷컴 산하 물류기업 징동로지스틱스는 최근 인천과 이천에 자체 물류센터를 구축하고 본격 한국 공략에 나섰다. 징동닷컴은 앞서 국내에 진출한 알리익스프레스의 모회사인 알리바바, 테무를 운영하는 핀둬둬와 함께 중국 3대 전자상거래 업체로 꼽힌다.
업계에선 C커머스의 국내 진출이 단순한 유통 경쟁을 넘어 동대문을 중심으로 한 국내 의류 제작 생태계를 위협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특히 징동닷컴은 알리·테무와 달리 미국 아마존처럼 ‘직매입’ 방식으로 운영된다. 자체 통합 공급망을 통해 재고 관리와 물류 효율을 극대화하고, 운영 비용을 절감해 더 빠르고 저렴하게 상품을 유통할 수 있는 구조다. 그간 동대문이 맡아온 의류 공장과 소비자 사이의 ‘경유지’ 역할이 C커머스 기업들로 대체되는 셈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징동에서 취급하는 매출 물량이나 규모가 기존 알리·테무보다 훨씬 커 국내 패션 산업에 미칠 영향이 더 강할 것으로 내다봤다.
인력 줄고 공실 늘어...밀려드는 초저가 中의류
동대문 상권의 몰락은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2000년대 후반부터 온라인 패션 플랫폼이 성장하고 쇼핑 수요가 온라인으로 대거 옮겨가면서 타격을 입었다. 이후 2010년대 중후반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태, 2020년대 초반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상권은 급격히 쇠퇴했다. 한국섬유산업연합회가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섬유패션산업 전체 인력은 12만8516명(10인 이상 사업장 기준)으로 전년 동기 대비 2.7% 감소했다.
최근 본격화한 중국 업체들의 국내 시장 진출은 ‘엎친 데 덮친 격’이 됐다. 최신 유행을 빠르게 반영하는 속도와 저렴한 가격이라는 동대문의 성장 공식은 대규모 자본과 자체 물류 시스템을 기반으로 한 중국 기업의 초저가 경쟁이라는 현실에 맞닥뜨렸다.
특히 노후화된 상권 특성상 전통적인 거래 방식에 의존하는 점도 문제로 꼽힌다. 젊은 소비자나 신규 창업 유입을 막고 급변하는 유통 환경에 대응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이유다. 실제로 동대문 일대 패션 상가들 역시 종이 장부, 현금 위주 결제가 보이는 등 과거 거래 방식을 여전히 답습하는 모습도 보였다.
경기 침체가 장기화하고 오프라인 패션 시장에 대한 수요가 줄면서 상가 공실은 눈에 띄게 늘었다. 한국부동산원이 발표한 상업용 부동산 임대동향조사 결과를 보면 올해 1분기 동대문 상권의 공실률은 11.9%로, 서울 전체 평균(9.1%)을 훌쩍 웃돌았다.
반면 중국산 의류에 대한 수요와 국내 시장 의존도는 날로 높아지고 있다. 통계청에서 조사한 3월 온라인 쇼핑 동향 기준으로 올 1분기 온라인 해외 직접 구매액은 전년 동기 대비 5% 증가한 1조9551억원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중국 시장 직접 구매액은 1조2205억원으로 같은 기간 20% 증가했다. 중국산 의류 수입 중량은 해마다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기존 유통 방식에서 벗어나 브랜드 경쟁력 키워야
전문가들은 동대문 상권이 활기를 되찾으려면 ‘저가·속도’ 중심의 기존 유통 방식에서 벗어나 브랜드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고 조언했다.
추호정 서울대학교 의류학과 교수는 동대문 상권에 대해 “단순히 트렌드에 맞춰 옷을 생산하는 방식보다 일관된 콘셉트와 브랜드 정체성을 갖춘 브랜딩 전략이 필요하다”면서 “동대문 상권이 어렵긴 하지만 이를 기반으로 브랜드를 키워 성공한 사례도 적지 않다. (동대문에 스튜디오를 연) 무신사 등 새로운 유통 채널이 생긴 만큼 브랜드 파워를 키워 직접 소비자와 소통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박수림 한경닷컴 기자 paksr36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