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사진 No. 172
● 배재고 정문에 놓여진 어른들의 꽃일본 고시엔 야구와 형식은 비슷하지만 인기는 별로 없는 게 한국 고교 야구입니다. 다만 한국 야구 발전의 저변을 다지기 위해 수십 년간 유지되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고교야구에 어떤 추억이 있으신가요? 개인적으로 저는 고등학교 시절 결승전을 보기 위해 지금은 DDP로 변한 동대문야구장으로 응원을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상황이지만, 수도권에 있던 학교에서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동대문야구장에 가서 몇 십 년 만에 우승을 눈앞에 둔 동료와 후배들의 경기를 응원했습니다. 왜 말이 안 되는 상황이냐면, 그때 저는 대학 입시를 100일도 채 남기지 않은 고3이었으니까요.
전교생이 모두 간 것 같지는 않지만 꽤 많은 학생들이 함께 응원했고, 직업이 없었는지 평일이지만 동문 선배라는 분들도 재학생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목청 높여 응원하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얼굴이 불그레하게 상기된 선배 한 분이 저희에게 다가와 몰래 소주를 건네며 낭만을 이야기했던 기억도 납니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소주를 받지는 않았습니다.
학교와 학생, 동문들까지 열렬히 응원해 준 덕분인지 그날 우리 학교는 몇 십 년 만에 감격의 우승을 했고, 다음 날 조회 시간에 감독과 선수들이 학교 운동장 단상에 올라 박수를 받으며 우승기를 흔들었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앞으로 1년간 소유권을 갖게 된 우승기를 교장실 잘 보이는 곳에 놓으며 뿌듯해하셨습니다. 우승을 하면 학교의 위상이 올라갈 뿐만 아니라 선수들이 대학에 갈 수 있는 길도 많이 열리기 때문에, 상대를 꺾고 승리하는 것은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군대와 대학을 마치고 사진기자가 된 저는 지금도 꾸준히 고교 야구 대회 현장으로 일하러 갑니다. 작년과 올해도 몇몇 경기를 목동 경기장과 신월 야구장에서 지켜봤습니다. 과거처럼 응원단이 넘치지는 않지만, 승부에 대한 젊은 선수들의 열정은 여전합니다.
사진기자들은 그라운드에서 사진을 찍는 데다, 고교 야구의 경우 프로야구와 달리 취재진 숫자도 적기 때문에 더그아웃 근처 공간에 자리를 잡습니다. 그러다 보니 선수들의 응원 소리를 지겹도록 듣게 됩니다.
그런데 최근 야구장에서 불편한 점이 있었습니다. 선수들이 타석에 오르면 나머지 선수들이 자기 팀 선수를 응원하며 “가야지 가야지 안타 치고 가야지”를 반복하는데, 가끔 그 말의 뒷부분을 상대 팀 선수들을 향해 바꿔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제주도에서 올라온 팀을 향해 “가야지 가야지 감귤 따러 가야지” 하는 식입니다. 우리 팀에게 지고 얼른 집으로 돌아가라는 조롱인 셈입니다.“가야지 가야지”는 누가 처음 썼는지 모르지만, 입에 착 붙는 중독성 있는 라임이라 대부분의 학교에서 쓰는 응원이자 조롱의 형식이었습니다. 제가 불편함을 느낀 건 그 지점이었습니다. 주전 선수들이 경기장에 나가 있는 동안 더그아웃에 있는 1, 2학년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응원을 하는데, 목청 큰 선수가 선창하면 나머지가 따라 하는 형태입니다. 그런데 그 수위가 조롱과 야유까지 올라갈 때가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물론 옛날에도, 어른들의 경기에서도 그런 조롱과 야유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보는 눈이 많으면 어느 정도 여과되거나 과열을 막는 장치가 작동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최근 터진 배재고의 5·18 광주민주화운동 비하 논란을 보며, 이런 문제에 둔감했던 저를 반성하기도 했습니다. 터질 게 터져버렸다는 생각이 들어 며칠 전 고교야구를 전문으로 촬영하는 사진작가와 통화를 했습니다. 제가 느꼈던 것과 비슷한 이야기를 하셨는데, “최근 2, 3년 사이 조롱 응원의 수위가 높아지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분의 기억으로는 한동안 잦아들었던 유행이 최근 다시 나타났다고 합니다.

배재고 조롱 응원 사태를 옆에서 보며 불편했던 또 하나의 포인트가 있습니다. 화환입니다. 누군가 학교 정문 앞에 근조화환을 배달시켜 놨습니다. 야구부 선수들뿐 아니라 재학생들에게 반성을 촉구하는 의미 같았습니다. 그러자 또 다른 어른들이 배재고 학생들을 응원하는 조화를 가져다 놨습니다.
위 사진에서 흰색이 반성을 촉구하는 화환이고 왼쪽 붉은 색들이 배재고 선수단을 응원하는 화환입니다.
● 화환, 진영의 깃발이 되다문득 궁금해졌습니다. 화환에 정치적 입장의 의미를 담아 보내는 이 방식, 언제부터 생긴 걸까. 과거 사진들을 찾아봤습니다.
원래 꽃은 누군가의 기쁜 일을 축하하거나 슬픈 일에 위로를 건네는, 고급스러운 의사 표현 방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졸업식과 생일에 꽃가게에 들르고, 돈을 모아 친구 부모님 상가에 화환을 보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꽃이 정치의 영역에서도 활용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좋은 의도로 시작했습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그 많던 시위 현장에서 평화를 바라는 한 사람이 전투경찰의 방패 앞으로 다가가 꽃과 음료수를 건네는 사진을 가끔 만날 수 있었습니다. 비슷한 장면은 해외에서도 반복됩니다. 2013년 태국 시위 현장입니다. 우리가 먼저인지 외국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공권력이라는 커다란 물리력 앞에서 평화의 메시지를 던지는 방식이었습니다.

한두 송이의 꽃이 아예 화환의 형태로 메시지 전달의 도구가 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입니다.
2020년 1월, 당시 윤석열 검찰총장을 응원하는 화환이 대검찰청 로비까지 들어섰습니다. 당시 정부와 대립하던 검찰총장을 응원하는 목소리였습니다.

2021년 2월에는 반대쪽을 겨눈 근조화환이 대법원 앞에 등장합니다.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 김명수 대법원장의 사퇴를 촉구하는 보수단체의 근조화환이 일렬로 서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화환은 정치적으로 의견이 나뉘는 현장에서 내 목소리가 더 크다는 걸 증명하려는 소품으로 등장합니다. 2022년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석방 소식에 구치소 앞에 화환들이 대거 놓였고, 같은 해 5월 17일에는 한동훈 법무부 장관 후보자 지지자들이 보낸 꽃바구니가 과천 법무부 청사 앞으로 배달됐습니다. 2023년 7월에는 여의도 KBS 본관 주변에 보수단체들이 보낸 화환들이 늘어섰습니다. 이 무렵부터 화환은 세력을 과시하는 깃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보수 세력이긴 하지만 이번 배재고의 경우 꼭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 화환시위, 정치를 넘어 사회로
화환은 정치인만 겨누지 않았습니다. 2021년 4월, 영업 제한에 항의하는 유흥업소 관계자들이 서울시청 옆에 근조 화환을 세웠습니다.
같은 해 9월엔 예비 신랑·신부들이 결혼식 인원 제한에 항의하며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화환 시위’를 벌였고,

8월엔 대방초 학부모들이 그린스마트 미래학교 시행에 반대하며 근조화환을 세웠습니다. 2022년 7월에는 경찰국 신설에 반발하는 근조화환이 경찰청 인근에 설치됐고, 2024년 11월에는 동덕여대 남녀공학 전환 논의에 반대하는 학생·동문들이 백주년기념관 앞에 근조 화환을 갖다 놓았습니다.
● 아름다워야 할 꽃이 불쾌해지기까지
그리고 2026년 7월, 배재고 앞. 근조화환은 이제 애도가 아니라 공격의 언어가 되어 있었습니다. 리본에 적힌 문구는 고인을 기리는 대신, 살아있는 상대를 겨눕니다. 흥미로운 건 이 대목에서 예외가 하나 있었다는 점입니다. 한 현역 국회의원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응원 화환을 보낸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방송통신위원장에서 물러날 때 시민들이 보내준 화환에서 위안을 받았다며, 이번엔 자신이 그 화환을 돌려보낸다고 SNS에 직접 밝혔습니다. 익명 뒤에 숨는 대신 이름을 내건 유일한 발신자였던 셈입니다. 그럼에도 정작 같은 당 안에서조차 “어른답지 못한 행동”이라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사진들을 시간순으로 늘어놓고 보니 더 근본적인 차이가 보입니다. 1990년대 서울의 시위 현장에서, 2013년 태국에서 꽃을 든 손은 자기 주머니에서 꽃 한 송이를 사서 직접 내밀었습니다. 몸을 움직여야 했고, 상대와 마주 서야 했고, 무엇보다 그 꽃 한 송이에는 ‘나’라는 개인이 담겨 있었습니다. 오늘의 근조화환은 다릅니다. 전화 한 통, 계좌이체 한 번이면 누군지 알 수 없는 다수의 이름으로 화환이 배달됩니다. 보내는 사람은 현장에 나타나지 않아도 됩니다. 마주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리본에 적을 문구만 결정하면, 꽃집이 나머지를 대신 해줍니다.
더그아웃에서 울려 퍼지는 “가야지 가야지”도 처음엔 그저 우리 편을 향한 함성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 구호가 상대 팀을 향한 조롱으로 뒤집히는 순간은,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알 수 없는 합창 속에서 옵니다. 한 사람이 나서서 “너희들 형편없다”고 소리치면 곧바로 손가락질을 받겠지만, 다 같이 “가야지 가야지”를 외치면 아무도 그 조롱의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배재고 앞에 놓인 화환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화환을 보낸 사람은 대부분 익명 속에 숨고, 리본에 적힌 문구만 남습니다. 자기 이름을 걸고 학교 앞에 직접 서서 항의하거나 응원하는 어른은 드물었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좋아요 0개
- 슬퍼요 0개
- 화나요 0개

3 hours ago
3
![김연아, 발로 강아지 쓰담쓰담..누리꾼 반응 폭발 "연느도 사람이었어"[스타이슈]](https://image.starnewskorea.com/cdn-cgi/image/f=auto,w=1200,h=840,fit=cover,q=high,sharpen=2/21/2026/07/2026071115251530039_1.jpg)



![‘161cm’ 쯔양, ‘217cm’ 최홍만 품에 쏙…“아빠와 딸 같아” [SD셀픽]](https://dimg.donga.com/wps/SPORTS/IMAGE/2026/07/11/134279017.1.jpeg)
!['전과 6범' 임성근, 파주 식당 대기만 220팀.."준비 미흡한 점 인정"[스타이슈]](https://image.starnewskorea.com/cdn-cgi/image/f=auto,w=1200,h=840,fit=cover,q=high,sharpen=2/21/2026/07/2026071114451729966_1.jpg)

!['전반기에 100안타' 놀랍다 이정후... 9회초 역전 허용→9회말 '아웃된 주자 살아났는데' 결국 3-4 패배 [SF 리뷰]](https://image.starnewskorea.com/cdn-cgi/image/f=auto,w=1200,h=800,fit=cover,q=high,sharpen=2/21/2026/07/2026071113103990456_1.jpg)
![[속보] 北, 韓·EU성명에 “체제존중 위장 내던져…韓 적대 원칙 불변”](https://pimg.mk.co.kr/news/cms/202606/13/news-p.v1.20260613.89255ddca2b0487c98e7f979e85a8a39_R.jpg)





English (U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