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 '극한직업' 등 작품성과 흥행성을 동시에 인정받는 천만 영화를 쏟아내며 '영화 명가'라는 찬사를 받았던 CJ ENM이 부진의 늪에 빠졌다. 상반기 영화 배급사 순위 최하위에 머무는가 하면, 올여름 유일하게 개봉한 윤아, 안보현 주연의 영화 '악마가 이사왔다' 마저 흥행 참패를 겪으며 체면을 구겼다.
CJ ENM은 올해 상반기 연결 기준 매출 2조 4511억 원, 영업이익 293억 원을 기록했지만, 영화·드라마 부문에서는 243억 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다. 3년째 이어진 적자로, 매출 비중 약 30%를 차지하는 주요 사업임에도 실적 부진이 뚜렷하다. 영화·드라마 사업의 적자는 단순한 숫자를 넘어, CJ ENM이 한국 영화계에서 차지해 온 상징성과 입지가 흔들리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8월 13일 개봉한 '악마가 이사왔다'는 누적 관객수 40만 명에도 못 미치는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942만 관객을 동원한 '엑시트'의 이상근 감독과 윤아가 다시 손을 잡은 기대작이었으나, 흥행 성적은 처참하다. 손익분기점 170만 명 달성이 어려울 것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상반기 극장 관객 수가 전년 대비 32.5% 줄며 침체를 겪었지만, 7월 말 개봉한 '좀비딸'이 500만 관객을 넘기며 반전을 이끌었다. 한 주 뒤 개봉한 '악마가 이사왔다'의 추이는 '좀비딸'에 비교하면 안타까울 정도다. 특히 정부의 영화관 할인권 정책으로 극장가에 활기가 돌았지만, 수혜를 온전히 누리지는 못한 셈이다. '좀비딸'은 할인권 시행 첫날만 43만 명을 동원하며 분위기를 주도했다. 반면 '악마가 이사왔다'는 기대 대비 부진한 성적으로 상반기 흥행 편차를 드러냈다.
2020년 이후 CJ ENM이 투자·배급한 작품 가운데 손익분기점을 넘긴 작품은 '헤어질 결심', '공조2: 인터내셔날', '베테랑2' 등 단 세 편에 불과하다. 일각에서는 '영화 사업 철수설'까지 제기되며, 한국 영화산업을 주도하던 CJ ENM의 입지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는 관측이 지속해서 나온다.
실제로 올해 상반기 전체 배급사 순위에서 CJ ENM은 7위에 머물렀다. 매출액 기준 1위는 '히트맨2'(240억 원), '승부'(200억 원) 등으로 총 535억 원을 기록한 신생사 바이포엠스튜디오가 차지했다.
이어 워너브러더스 코리아가 508억 원, 롯데컬처웍스가 467억 원, NEW가 450억 원으로 상위권을 형성했다. 메가박스 플러스엠도 433억 원을 올리며 CJ ENM을 앞섰다. CJ ENM은 이들과 비교해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든 셈이다.
그러나 하반기 반등을 점치는 시각도 있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가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됐기 때문이다. 베니스 경쟁 부문 초청은 한국 영화로는 13년 만으로, 박찬욱 감독이 황금사자상 수상에 도전한다.
박 감독이 황금사자상 수상에 성공할 경우 한국 영화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된다. 영화계 관계자는 "수상 여부와 상관없이 베니스에서의 반응이 향후 흥행 성적을 좌우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CJ ENM은 하반기에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와 함께 엠마 스톤 주연 할리우드 영화 '부고니아'를 배급한다. '부고니아'는 한국 영화 '지구를 지켜라!'를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CJ ENM이 시나리오 단계부터 참여해 제작 전반을 주도한 글로벌 프로젝트다. 이 작품은 한국 영화사의 자산이 글로벌 시장으로 확장되는 상징적 사례로 주목받는다.
이미경 CJ그룹 부회장도 제작과 배급에 깊숙이 관여하며 글로벌 행보를 이어간다. 이 부회장은 '어쩔수가없다'의 총괄 프로듀서로, '부고니아'의 프로듀서로 이름을 올렸다. 현재 베니스 영화제에 참석한 상황.
영화계에 따르면, 이미경 CJ그룹 부회장은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가 글로벌 무대에서 관객을 만날 수 있도록 지원에 힘쓰고 있다. CJ ENM 관계자는 "'어쩔수가없다'의 해외 진출과 성공적인 배급을 위해 이 부회장이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규연 미래에셋증권 연구원은 "'어쩔수가없다'는 이미 해외 판매를 통해 손익분기점을 달성한 것으로 파악된다"며 "정부의 영화산업 지원 정책과 관객 증가 흐름을 감안하면 CJ ENM의 수익 개선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영화계 관계자는 "CJ ENM이 과거 '명가'라는 위상을 되찾기 위해서는 작품 다양성과 흥행력을 동시에 확보해야 한다"며 "올 하반기 결과가 향후 사업 방향에 중대한 변곡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예랑 한경닷컴 기자 yesr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