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부고니아’는 올해 베니스 영화제에서 주목받는 작품 중 하나다. 경쟁부문에 초청되며 황금사자상 후보에 올랐다. 특히 한국 영화 애호가들이 함께 경쟁 부문에 오른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 만큼이나 기대하는 눈치다. 장준환 감독의 2003년 ‘지구를 지켜라!’를 리메이크했단 점에서다.
‘미드소마’의 아리 애스터가 제작을 맡고, 할리우드의 젊은 거장 반열에 오른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메가폰을 잡아 이제는 그의 페르소나라 부를 수 있는 할리우드 스타 엠마 스톤과 합을 맞췄다. 공상과학(SF), 스릴러, 코미디를 묘하게 섞으며 ‘시대를 앞선 괴작’이란 평가를 받았던 작품은 어떻게 새롭게 태어났을까. 지난 27일과 28일 이틀 간 진행된 라운드 인터뷰와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부고니아 팀’을 만났다.
영화의 흥미로운 점은 원작과 달리 여성의 비중이 크다는 것이다. 음모론에 사로잡힌 테디(제시 플레먼스)와 사촌 돈(에이단 델비스)이 지구를 망가뜨리는 외계인이라 판단한 한 대기업의 최고경영자(CEO)를 납치해 벌어지는 사건이 영화의 출발점이다. 이 CEO를 남성으로 설정한 원작과 달리 영화는 미셸(엠마 스톤)이라는 여성을 전면 배치해 서사를 끌어 나간다. 원작의 병규(신하균)와 맞서는 강만식(백윤식)의 남성 중심 구도가 깨진 것. 그래서일까. 영화 전반에 끊임없이 긴장감을 부여하는 미셸의 여성적 정체성은 전통적인 강자(남성·권력자)와 약자(여성·피지배자)의 고정관념을 살짝 벗어난다. 이 결과 가해자와 피해자, 지배층과 피지배층, 외계인과 인간이라는 원작의 이분적 구도도 조금씩 모호해진다.
여기서 드는 의문은 캐스팅을 위해 의도적으로 캐릭터의 성별을 교체했느냐다. 란티모스 감독이 ‘더 페이버릿’으로 시작해 ‘가여운 것들’(2023), ‘카인즈 오브 카인드니스’(2024)까지 연이어 엠마 스톤과 함께 작업해오고 있어서다. 특히 ‘가여운 것들’은 발군의 연기력을 보인 엠마 스톤의 활약으로 란티모스 감독에게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안겼다.
물론 배우에 대한 편애로 원작의 흐름을 바꾼 건 아니다. 라운드 인터뷰에서 만난 엠마 스톤은 “아리 애스터가 원작 영화를 굉장히 좋아했고, 그의 제작 파트너가 각본가 윌 트레이시에게 시나리오를 의뢰했다”면서 “몇 년이 지나 란티모스가 시나리오를 받게 된 건데, 저로서는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이미 시나리오 제작 단계에서 강만식은 미셸로 바뀌게 돼 있었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란티모스는 “전반적으로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만족감을 드러냈다. 그는 공식 기자회견에서도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바로 반응이 왔다”며 “조금씩 (시나리오를) 흔들어보며 상상했던 것과 맞춰 나갔는데, 믿기 어려울 만큼 강렬했던 여정”이라고 말했다.
현명한 선택이라고 판단한 이유는 모호함에 있다. 스톤은 “이 시나리오로 란티모스가 연출한 ‘부고니아’의 장점은 극단적 긴장감 속에서도 이야기가 펼쳐진다는 점”이라며 “한 가지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또 다른 일이 일어나고, 선한 사람이 옳은 일을 행하는 것인지 아니면 미친 사람이 미친 짓을 하는건지 판단이 내내 뒤집힌다”고 말했다. 충격적인 스토리가 지닌 원작의 강렬함에 모호함이라는 변주로 극적 긴장감을 끌어올렸다는 것이다. 스톤은 “강렬함과 모호함이 더해진 층위가 현명했던 선택”이라고 덧붙였다.
모호함과 층위라는 단어에 깔린 ‘부고니아’의 개념을 풀어 설명하면 이렇다. 경계를 지우고, 세상을 더 다양하게 나누는 것. 이는 어떤 장르로 구분하기 어려웠던 원작과 어느정도 일맥상통하는 지점이다. 외계인 음모론이라는 외피 아래 기술과 권력, 인간 본성에 대한 경고를 층층이 쌓아 올린 것이다. 실제로 원작과 ‘부고니아’ 모두 외계인과 인간의 대결 구도로 시작하지만, 러닝타임이 흐르면서 SF적 장르를 벗어나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만든다. 외계인으로 표상되는 권력자나 부자는 나쁘고, 인간으로 남는 약자나 가난한 자가 과연 선하기만 한 것인지에 대한 인지적 혼란도 안겨준다.
이에 대해 란티모스 감독은 “오늘날 기술은 우리는 좁은 믿음의 틀 속에 가두고, 여기서 벗어나기 어렵다”면서 “영화도 전형적인 캐릭터가 등장하고, (관객들은) 처음에 이들이 어떤 인물인지 다 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인물이 가진 다양한 층위가 드러나며 얼마나 우리가 복잡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고, 때론 누구를 응원해야 할지조차 모를 지경에 이른다”면서 “영화는 인간 본성이 무엇인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영화가 시종일관 딱딱하고 혼란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충분히 유머러스하고, 영화적으로 재밌는 지점도 더러 보인다. 배경이나 의상 같은 부차적 요소가 아닌 배우 본연의 연기력의 비중을 키운 연출이 흥미롭다. 스톤은 “이번 작품은 정말 대사가 많아서 장면에 충분히 몰입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만 했다”고 말했다. 긴박감을 드러내는 배경음악이 영화와 어울리지만, 의외로 시나리오를 모른 채 작곡됐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란티모스 감독은 “음악감독에게 시나리오를 보여주지 않고 키워드만 몇 개 던졌다”면서 “전적으로 그의 해석에 맡겼는데, 오히려 그런 자유로움이 풍성한 결과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베니스 영화제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공개되는 ‘부고니아’는 국내에서도 관객과 만난다. 우선 다음달 17일 개막하는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아이콘 섹션에 초청돼 관객과 만나고, 이후 11월 국내 개봉할 예정이다. 작품 제목으로 쓴 라틴어 부고니아가 어떤 뜻을 담고 있는지를 알아보거나, 원작을 한 번쯤 복습 해본다면 보다 선명하게 감상할 수 있다.
베네치아=유승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