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구조조정을 위한 두 제도인 워크아웃과 회생절차의 장점을 동시에 활용할 길이 열린다. 서울회생법원은 16일 ‘하이브리드 구조조정’과 ‘프리(Pre)-ARS’(예방적 자율구조조정) 제도를 다음달부터 시범 운영한다고 밝혔다.
정준영 서울회생법원장은 “내년 말 일몰 예정인 기업구조조정촉진법상 워크아웃 제도를 유지하면서 법원이 회생을 적극 지원하기 위한 목적”이라며 “워크아웃과 회생절차의 장점을 결합한 ‘K구조조정’ 제도가 탄생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이브리드 구조조정은 금융위원회 주도의 워크아웃과 법원의 회생절차를 동시에 진행하는 방식이다. 워크아웃으로 금융채권을 조정하고 신규 자금을 지원받으면서 자율구조조정(ARS) 회생을 신청하면 법원의 ‘포괄적 금지명령’으로 채권자의 강제 집행을 막고 최대 3개월간 워크아웃에 집중할 수 있다.
프리-ARS를 택하면 회생절차 신청 전 법원의 ‘민사 조정절차’를 통해 주요 채권자와 비공개로 채무조정 협상을 할 수 있다. 그동안 기업은 대출 기한이익 상실과 거래처 이탈 등 낙인효과 때문에 회생철차 신청을 주저해왔다.
회생절차 신청 前 법원이 조정…채권자·기업 모두 '윈윈'
서울회생법원 'Pre-ARS·하이브리드 구조조정' 도입
한국 기업들은 그동안 경영 위기가 닥치면 채무자회생법상 회생절차나 기업구조조정촉진법상 워크아웃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하지만 기업 구조조정을 위한 두 제도엔 명확한 한계가 있었다. 회생절차는 낙인효과 탓에 구조조정 골든타임을 놓치기 십상이었고, 워크아웃은 채권단의 강제 집행을 막을 마땅한 대응책이 없었다.
서울회생법원이 새로 도입한 ‘예방적·하이브리드 기업 구조조정’ 제도는 이런 딜레마를 해소하기 위한 방안이다. ‘하이브리드 구조조정’은 워크아웃과 회생절차의 장점을 결합해 효과적인 기업 회생을 지원하는 게 핵심이다. 법원이 함께 도입하기로 한 ‘Pre-ARS’(예방적 자율구조조정)는 회생절차 신청 전 기업에 채권자와 비공개로 협상할 기회가 주어진다.
◇ 워크아웃과 ARS 회생을 동시에
16일 서울회생법원에 따르면 하이브리드 구조조정은 워크아웃과 회생절차 두 제도가 양자택일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정준영 회생법원장은 이날 기업회생 제도 개선 설명회에서 “일곱 번째 기업구조조정촉진법이 내년 말 다시 일몰을 앞두고 있다”며 “두 제도의 장점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방식으로 현행법 안에서 기업 구조조정 제도를 효율적으로 바꿔보고자 한다”고 말했다.
워크아웃은 금융위원회가 금융기관을 조정해 금융채무 조정과 신규자금 지원에 유리하지만, 상거래 채권자가 많거나 중요 자산에 대한 강제 집행이 이뤄지면 진행이 어려운 게 현실이다. 하이브리드 구조조정은 이런 약점을 법원의 ‘포괄적 금지명령’으로 해결한다. 또 최대 3개월간 회생 개시를 보류해 기업이 워크아웃 협상에 집중할 수 있게 한다. 협상이 성공하면 회생신청은 취하되고, 워크아웃이 실패하더라도 이미 회생신청이 돼 있는 만큼 부채 기준 절반 이상의 채권자 동의만으로 사전계획안(P플랜)을 통해 신속히 회생절차를 마무리할 수 있다. 황성민 서울회생법원 판사는 “그동안 워크아웃이냐 회생절차냐를 놓고 실무상 고민이 컸는데, 현행법 안에서도 두 제도의 장점을 모두 활용할 수 있다”며 “은행이 주요 금융채권자고 상거래 채권자가 많은 기업이라면 하이브리드 방식으로 더 유연한 구조조정이 가능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 Pre-ARS로 낙인 없이 구조조정
새로 도입하는 Pre-ARS는 미국의 ‘구조조정지원약정’(RSA)과 일본의 ‘채무변제협정조정’ 등 선진국 제도를 벤치마킹한 제도다. 글로벌 렌트카 기업 허츠는 코로나19로 경영난에 처했지만, RSA를 통해 사전 협상 후 회생절차를 신속히 진행해 190억달러(약 26조원) 부채를 조정하고 기업가치를 보존했다. 화장품 기업 레브론(부채 33억달러)과 항공기 리스회사 노르딕애비에이션캐피털(63억달러)도 같은 방식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이들은 일반 회생절차와 달리 정상 영업을 유지하며 채권자와 협상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일본에서도 ‘채무변제협정조정’을 통해 많은 기업이 도산절차 없이 재기에 성공했다.
반면 국내에선 회생절차 신청 즉시 대출 기한이익상실로 모든 대출금에 대한 상환 압박과 거래처 이탈 등 낙인효과가 컸다. 2018년부터 채무자와 채권자 간 자율 협약을 위해 시행된 ARS 프로그램도 회생절차를 전제로 해 이런 문제를 피할 수 없었다.
앞으로 Pre-ARS를 활용하면 기업들은 회생절차 신청 없이도 법원의 ‘민사 조정절차’를 통해 주요 채권자와 비공개 협상이 가능하다. 조정재판부는 서울회생법원장이 맡을 예정이다. ‘금융채무 조정이 필요한 경우’ ‘구조조정 협상이 필요한 경우’ 등 완화된 요건으로 채무조정을 신청할 수 있다. 채무조정 합의 시 기업은 조정신청을 취하하고 약정서를 작성하게 되며, 합의 실패 시엔 회생절차(P플랜), 워크아웃, 하이브리드 구조조정 중 유연하게 선택할 수 있다.
기업들은 다음달 1일부터 법원에 새 제도를 신청할 수 있다. 법조계에서는 채무자·채권자가 유연하고 선제적인 구조조정을 할 수 있는 수단이 마련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도산 전문인 김동규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기업 입장에선 위기 초기 단계부터 주거래 은행과 협상할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한다는 차원에서 유리하다”며 “채권자도 워크아웃 과정에서 법원 지원으로 강제집행 위험 없이 협상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라고 말했다.
허란 기자 wh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