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년 만에 일 냈다"...삼성 제치고 세계 1위 오른 흙수저 D램 기업 [반도체 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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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신문 반도체 담당 기자들이 온라인 코너 '반도체 포커스' 연재를 시작합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같은 한국 반도체 대기업과 엔비디아 등 외국계를 담당하는 산업부 전자팀, 반도체 최신 기술을 취재하는 테크&사이언스부 테크 담당, 중소기업부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담당 기자가 함께합니다. 국내외 반도체 산업 생태계 곳곳에서 발생한 뉴스를 한경 만의 관점을 담아 전해드립니다.

SK하이닉스가 2025년 1분기 D램 시장에서 점유율 세계 1위에 올랐다. 1992년 이후 33년간 삼성전자가 지켰던 1위 자리를 SK하이닉스가 빼앗은 것이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가 집계한 SK하이닉스 점유율은 36%, 삼성전자(34%)를 2%포인트 차로 제쳤다.

창립 42년 만에 D램 산업에서 새로운 역사를 쓴 SK하이닉스 임직원들은 어느 때보다 고무된 모습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도 삼성전자 대신 경기 이천의 SK하이닉스를 먼저 찾을 정도로 위상이 올라갔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운데)가 SK하이닉스 이천 캠퍼스에서 곽노정 사장(왼쪽 세번째) 등과 함께 웨이퍼를 살펴보고 있다. 한경DB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운데)가 SK하이닉스 이천 캠퍼스에서 곽노정 사장(왼쪽 세번째) 등과 함께 웨이퍼를 살펴보고 있다. 한경DB

D램 1위가 바뀐 배경엔 고부가가치 D램인 고대역폭메모리(HBM)가 있다. SK하이닉스가 HBM3E 12단 등 '첨단'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에서 점유율 90% 이상을 차지하며 매출을 빠른 속도로 늘렸다.

HBM만으로 SK하이닉스의 부상을 모두 설명할 수 없다는 분석도 나온다. 최근 10나노(nm)급 6세대(1c) D램, 300단 이상 낸드플래시 등 일반 제품 개발·양산 경쟁에서도 SK하이닉스가 '세계 최초' 타이틀을 가져가는 사례가 늘고 있다.

그동안 SK하이닉스에 있어 삼성전자는 넘기 힘든 벽이었다. 삼성전자의 D램 생산 능력(캐파)은 SK하이닉스의 약 1.5배로 추정된다. R&D 비용, 시설투자비 등 투자 규모 또한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가 SK하이닉스의 1.5배~2배 수준이고 엔지니어 수도 SK하이닉스보다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상황에서 SK하이닉스가 1위에 오른 건 '기적'에 가깝다는 평가가 나온다. SK하이닉스의 힘은 어디서 나온 걸까. SK하이닉스를 잘 아는 사람들에게 들어봤다.

'까라면 까'는 문화가 없다

반도체 업계에선 'SK하이닉스의 치열한 기술 토론 문화'가 1위 등정의 발판이 됐다고 말한다. SK하이닉스에선 기술 개발에 관해선 엔지니어 사이에 선·후배가 없다고 한다. 임원 지시에 실무진이 다른 의견을 내고 서로 합의점을 찾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위에서 아래로 하향식 개발 목표가 하달되고 실무진은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경쟁사와 차이가 크다.

예컨대 10nm급 1세대 D램 개발 때 임원이 "선폭을 19nm로 개발하라"는 지시가 내려와도 실무진이 "선폭 19.5nm가 맞다. 그래야 안정적 성능을 내는 게 가능하다"며 합리적인 근거를 대며 설득하면 받아들여진다고 한다.

실현 불가능한 목표를 세우고 억지로 달성해야 할 필요가 없으니 제품 성능도 경쟁사 대비 안정적이고 개발 속도도 빠르다는 평가를 받는다. SK하이닉스에선 1~2년 넘게 준비한 제품을 원점부터 다시 개발하거나 고객사의 지적을 받아 개선품을 만드는 상황도 흔치 않다.

시장조사업체 테크인사이츠에 따르면 10나노 5세대급 1b D램의 선폭은 삼성전자가 12.54nm, SK하이닉스는 12.65nm, 마이크론은 13.04nm다. 수치만 놓고 보면 삼성전자의 기술력이 가장 뛰어난 것이다. 하지만 시장에서 나오는 D램 성능에 대한 평가는 SK하이닉스가 가장 긍정적이다.

경쟁사 출신 경력직도 '우리 편'

회사에서 승진, 목표 달성 등을 놓고 구성원끼리 치열하게 경쟁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로 평가된다. 그런데 치열한 직원 간 경쟁 여파로 '이기주의'가 심화하고 개인·조직 간 '벽'이 생기면 그 회사의 힘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SK하이닉스는 꾸준히 구성원들에게 '원팀' 문화를 강조한다. SK하이닉스가 최근 자사 뉴스룸에 올린 게시물에서 혁신적 성과의 배경으로 '원팀 스피릿(One Team Spirit)'을 꼽을 정도다.

SK하이닉스 용인 클러스터 건설 현장. 한경DB

SK하이닉스 용인 클러스터 건설 현장. 한경DB

경쟁사에서 SK하이닉스로 이직한 경력직이 가장 많이 놀라는 것도 '공유'와 '협업' 문화다. SK하이닉스에선 특정 프로젝트를 여러 부서가 모여 진행할 때, 직원들은 다른 부서의 협업 파트너를 어떻게 도우면서 시너지를 낼지 고민한다고 한다.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 중요한 정보를 공유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대신 자신의 것을 먼저 내준 사람에 대해선 모두가 기억하고 향후 보상의 근거를 남겨놓는 문화가 뿌리내려져 있다.

한 SK하이닉스 경력직원은 "전 직장에선 본인 성과를 위해 핵심 정보를 동료 직원에게 넘겨주지 않는 사례가 비일비재했고 그러다 보니 직원, 조직 간 협업이 쉽지 않았다"며 "지금 회사에선 놀라울 정도로 정보가 오픈돼있고 부서 간 협력이 자연스럽다"고 설명했다.

SK하이닉스는 흙수저...헝그리정신으로 성공

"한 과목 잘한다고 1등이겠습니까. 국어, 영어, 수학 모두 잘해야죠."

2022년께 생성 AI의 등장과 함께 HBM과 SK하이닉스에 대한 관심이 커졌던 때의 일이다. 비공식 자리에서 만난 SK그룹 최고위 경영자 C씨에게 "HBM 1위 SK하이닉스의 시대가 오는 것 아니냐"고 물었더니 돌아온 답이다. HBM 과목에선 승기를 잡았지만, 범용 D램과 낸드플래시 등에선 여전히 경쟁사가 강하기 때문에 축배를 들 상황이 아니라는 의미다.

33년 D램 세계 1위 삼성전자는 SK하이닉스에 두려움의 상대이자 언젠가 넘어야 할 벽이었다. 삼성전자의 제품 개발 속도가 SK하이닉스 대비 6개월~1년 정도 앞섰다. SK하이닉스가 A 제품을 개발했다는 소식을 알렸을 때, 삼성전자는 같은 제품의 '양산'을 선언했다. SK하이닉스 임직원들은 좌절했다.

30년 넘게 2등만 하며 다져진 SK하이닉스의 '헝그리 정신'은 약이 됐다. 1등이 되기 위해, 1등이 하지 않는 분야에도 묵묵히 투자했고, 결국 기회가 왔다. 기적처럼 터진 게 HBM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로고. 한경DB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로고. 한경DB

1등만 하던 삼성전자는 HBM 시장에서 2등이 되자 갈피를 못 잡고 있다. SK하이닉스가 짜놓은 판에서 빠르게 추격해야 하는 상황이 낯설기 때문이다.

삼성전자가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다 보니 평소대로 하는 SK하이닉스가 돋보이고 있다는 진단도 나온다. HBM 추격을 위해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고 인력을 투입했지만 큰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서 다른 D램, 낸드플래시 제품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반도체업계 고위 관계자는 "강남 8학군 출신으로 온실 속 화초처럼 큰 우등생(삼성전자)이 갑작스러운 위기를 맞자 흔들리는 것 같다"며 "삼성이 상대적으로 부진한 게 SK하이닉스가 부상한 배경"이라고 평가했다.

메모리반도체 석학으로 평가받는 황철성 서울대 석좌교수(재료공학부)는 "지금도 삼성전자의 인력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다고 볼 수 있지만 경쟁력이 약화한 건 수년간 투자가 분산된 영향이 크다"며 "SK하이닉스의 헝그리 정신이 힘을 발휘했고, 위 아래가 합을 맞춰 하나로 움직이는 SK하이닉스의 조직 문화가 시너지를 내고 있다"고 분석했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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