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효림의 베스트셀러 레시피] |
| 많은 사람들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는 베스트셀러. 창작자들은 자신이 만든 콘텐츠가 베스트셀러가 되길 꿈꾸지만, 실제로 실현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이 희귀한 확률을 뚫고 베스트셀러가 된 콘텐츠가 탄생한 과정을 들여다본다. 창작자의 노하우를 비롯해 이 시대 사람들의 욕망, 사회 트렌드 등을 확인할 수 있다. |
‘사람이 온다는 건/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저 안에 태풍 몇개/천둥 몇개, 벼락 몇 개’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 중 일부다. 광화문글판에 담겨 큰 사랑을 받았다.1991년 1월 시작돼 올해 서른다섯 살이 된 광화문글판은 많은 이들을 보듬어줬다. 글판은 광화문, 강남, 제주의 교보생명 사옥에 걸린다. 계절별로 1년에 네 번 건다. 글판은 대산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독자들은 “힘을 건네고 슬픔을 어루만지며 하루의 마음을 정리하게 만드는 글판”, “마음이 토닥토닥되는 느낌”이라는 소감을 올렸다. 지인에게 책을 선물했다는 이도 많다.
책 편집자인 정혜림 교보문고 출판콘텐츠사업단 지식출판팀 차장(44)과 글판 실무를 담당하는 노기민 교보생명 사사편찬추진TF 대리(35)를 2일 서울 종로구 교보생명 본사에서 만났다.
정 차장은 두 번째 책부터 네 번째 책까지 편집을 맡았다. 정 차장은 “글판은 1년에 네 번 올라가기에 5년 주기로 책을 내면 20개 글귀를 추가하게 된다. 앞으로도 5년마다 개정판을 낼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글귀를 뽑는 ‘베스트 글판’ 투표도 5년마다 하고 있다.첫 글판은 ‘우리 모두 함께 뭉쳐 경제 활력 다시 찾자’로, 초반에는 표어를 담았다. 1997년 외환위기가 닥치자 사람들을 위로하고 응원하는 시로 바뀌었다. 신경림 정호승 문정희 윤동주 괴테 등 국내외 작가의 작품이 소개됐다. 2010년 힙합 뮤지션 키비의 노래 가사를 소개하고 2020년과 2021년에는 방탄소년단(BTS)과 협업했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속 내레이션 ‘아빠의 겨울에 나는 녹음이 되었다. 그들의 푸름을 다 먹고 내가 나무가 되었다’를 담는 등 계속 변화하고 있다.

정 차장은 “글판 20주년 기념으로 낸 첫 책 주제는 ‘쾅쾅 가슴을 울리는 한 마디’였다. 두 번째 책부터 글판 이미지를 함께 담았다”고 했다.
세 번째 책에는 나태주 정현종 백무산 장석주 천양희 이준관 정호승 허형만 김사인까지, 글판에 시가 소개된 시인들의 인터뷰를 실었다. 나태주 시인은 오랜 시간 무명의 설움을 겪다 2012년 봄 소개된 ‘풀꽃’으로 단숨에 ‘국민 시인’으로 등극했다. ‘풀꽃 시인’으로 불리는 나 시인은 “뜻밖에 찾아온 커다란 선물”이라고 말한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너도 그렇다’는 ‘풀꽃’은 시 전문을 외우는 이들이 많다.
세 번째 책부터 계절별로 구성했다. 네 번째 책에는 문안선정위원인 김연수 안희연 요조 유희경 장재선의 인터뷰를 담았다.
글판의 글자 수는 30~40자여서 원문을 그대로 싣지 못할 때가 있다. 노 대리는 “원문을 다듬어 사용할 때는 선정위원들이 의견을 내고 작가에게 동의를 받는다”고 했다. 작가들은 작품이 선정됐다는 연락을 받으면 “나를 잊지 않고 찾아주는 느낌”이라며 반긴다.
글판에 실린 작품에는 저작권료를 낸다. 글 선정 작업은 글판이 올라가기 6개월 전부터 시작된다. 글귀 공모 공지가 출발점이다.
“시민 공모로 2000건 넘게 들어와요. 한 분이 100건을 보내는 경우도 있었어요. 젊은층은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의 노래 가사를 많이 보냅니다.”(노 대리)
선정위원도 후보작을 낸다. 시민 공모작과 선정위원 추천작을 합쳐 검토한 후 40~50건으로 추린다. 시 소설 수필 등을 포함해 영화 대사, 명언, 노래 가사까지 좋은 글은 모두 글판에 오를 수 있다.
선정위원들은 작가 이름을 가린 채 글만 보고 토론해 최종 문안 2개를 정한다. 글은 계절에 맞아야 하고 시의성이 있어야 한다. 이해하기도 쉬워야 한다. 이후 교보생명 임직원 투표 및 선정위원들의 의견을 반영해 최종 글을 확정한다.
노 대리는 뜻이 바로 파악되지 않는 글은 제외한다고 했다. 운전자의 안전 때문이다.
“광화문은 오가는 차량이 많잖아요. 운전하다 글귀를 보고 의미를 파악하려 애쓰다 ‘아차’하는 순간 교통사고가 날 수도 있으니까요.”
글판 디자인은 2000년 이후 계절 사진을 넣었고 2004년부터 삽화, 순수 회화, 캘리그래피(손그림글씨) 등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디자인은 시안 30~40개 중 하나를 고른다.

글판은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김종삼 시인의 ‘어부’가 실린 2020년 겨울편이었다.(‘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사노라면/많은 기쁨이 있다고’) 보름달이 뜬 바다에서 어부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바다 아래의 고래가 이를 문 그림이었다. 환경단체들이 “고래를 잡으라는 거냐”고 항의했다. 이에 급히 낚싯대를 지웠다.
글판은 오랫동안 불법옥외광고물 논란에 휘말렸고 몇 차례 경고도 받았다. 하지만 시 위주로 글이 바뀌고 ‘교보생명’ 표기를 빼면서 담당 구청은 공익성을 인정해 2007년 글판을 단속하지 않기로 했다.
새 글판은 매년 3, 6, 9, 12월 첫째 주 월요일에 볼 수 있다. 이를 위해 전날인 일요일에 글판을 단다. 글을 인쇄한 합성수지 천 ‘플랙스’는 햇빛을 받으면 늘어나고 햇빛이 없으면 수축한다. 이 때문에 일조량이 적은 겨울과 봄에는 낮에 설치하고, 여름과 가을에는 저녁에 단다. 글판 설치에는 4~5시간이 걸린다.
글판은 신문지 800배 크기로, 가로 4.2m 원단 두 폭에 나눠 출력한 뒤 붙인다. 지지판은 나무판을 사용하다 썩는 등 문제가 생겨 알마이트판으로 바꿨다. 알루미늄과 폴리에틸렌 등을 결합해 만든 알마이트판은 천을 바로 붙이는 것보다 아래에 두 장 정도 천을 덧대는 게 좋다고 한다. 눈에 보이는 글판 아래 지난 글판 두 장 정도가 있는 것이다.
“글판을 설치하는 날에 맞춰 광화문을 찾아와 보시는 분들이 많아요. 요조 씨도 설치 과정을 지켜보신지 꽤 됐고요.”(노 대리)
비바람이 강하면 안전 문제로 설치 작업을 하지 못한다. 지난해 봄편을 다는 날,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 일요일에 못하고 평일에 설치했다.
천이 열을 받아 많이 울면 팽팽하게 당기는 작업도 한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갈 때 이런 일이 자주 있다고 한다.
“작업 날 비바람이 거세지 않길 늘 기도합니다. 항상 날씨를 확인해요. 날씨 때문에 이렇게 마음 졸이게 될 줄 몰랐어요.(웃음)”(노 대리)

광화문을 찾는 외국인이 늘면서 올해 여름부터 영어 원문을 병기했다. 메리 올리버의 시 ‘마지막 날들’이다. ‘동그랗게 말린 밝은 잎들이 속살거리지./지금이야!’ 원문은 ‘hiss the bright curls of the leaves. Now!‘.
글의 의미와 디자인, 작가에 대한 설명도 QR코드에 담았다.
“QR코드를 통해 시인이 해당 시를 낭송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한국인은 물론이고 외국인까지, 더 많은 분들에게 글판이 다가가게 하고 싶어요.”(노 대리)
“어릴 때 토요일마다 엄마와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왔어요. 글판을 좋아했는데 책을 만들며 애정이 더 커졌습니다. 글판을 다채롭게 느낄 수 있게 책을 변주해 나가겠습니다.”(정 차장)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광화문글판 문안선정위원회 엮음·교보문고·2025년)는….
1991년 1월 시작돼 올해 35년 된 광화문글판을 모두 담았다. 첫 책은 2010년 출간됐고 5년 간격으로 개정판이 나왔다. 2025년 출간된 책이 네 번째다. 글판 이미지와 함께 해당 글귀가 포함된 시 전문을 볼 수 있다.
초반에는 ‘나라경제 부흥시켜 가정행복 이룩하자’ 같은 계몽적 글을 담았다.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지자 위로를 주는 시를 싣기 시작했다. 이후 노래 가사, 드라마 대사 등으로 장르를 확대했다.
봄편은 ‘지키는 일이다,/지켜보는 일이다/사랑한다는 것은’(전봉건 ‘사랑’),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은/모든 순간이 다아/꽃봉오리인 것을’(정현종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이 장식했다.
‘여름은 동사의 계절/뻗고, 자라고, 흐르고,/번지고, 솟는다’(이재무 ‘나는 여름이 좋다’), ‘먼 데서 바람 불어와/풍경 소리 들리면/보고 싶은 내 마음이/찾아간 줄 알아라’(정호승 ‘풍경 달다’)도 있다.
‘이상하지,/살아 있다는 건,/참 아슬아슬하게/아름다운 일이란다’(최승자 ‘20년 후에 지芝에게’)는 가을을 장식했다. 2021년 광화문글판 100호 특별편은 방탄소년단(BTS)의 ‘Permission to Dance‘ 가사가 실렸다. ‘춤만큼은 마음대로,/허락은 필요없어’. 코로나19로 힘겨워 하는 사람들에게 자유로움과 희망을 전했다.
‘겸손은/머리의 각도가 아니라,/마음의 각도다’(이동규 ‘겸손’), ‘겨울 들판을 거닐며/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허형만 ‘겨울 들판을 거닐며’)가 겨울편으로 소개됐다.
삶의 무게에 짓눌리다 글판을 보고 엉엉 울고, 그리운 이를 떠올리는 등 글판에 얽힌 추억을 담은 시민의 글을 실었다. 작품이 소개된 국내외 작가와 가수에 대한 설명도 있다.
문안선정위원인 김연수 소설가는 글판에 대해 “사람들에게 시각적으로 입력돼 삶에 즉각적으로 개입한다”고 말한다. 담백하고 맑은 문장의 힘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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