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바지 입고서 회사에 가도, 깔끔하기만 하면 괜찮을 텐데.”
DJ DOC가 이 가사를 흥얼거리며 무대를 종횡무진한 게 30년 전인 1997년이다. 정부도 그즈음 여름철 복장 간소화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시작했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 볼까. 1960년 미디어아티스트 백남준은 독일에서 작품 발표 도중 스승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가위로 싹둑 잘라버렸다. 기성세대의 권위를 상징하는 넥타이를 자름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는 파격적인 선언이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직장인의 복장만큼은 지난 60여 년 동안 새 시대를 맞이하지 못했다. 여전히 우리는 매일 아침 출근길마다 상사의 눈치와 더위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한다. 특히 비즈니스 피플에게 여름은 잔인한 계절이다. 긴 바지에 구두를 신었다가 갑자기 비라도 내리면 종일 축축한 신발과 바지 밑단을 견뎌야 한다. 조금만 움직여도 셔츠 자락이 금세 젖어드는 더위에 재킷 차림은 고역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올여름은 유독 더 덥고 비도 많이 내린다고 한다. 이미 5월이라곤 믿을 수 없는 더위인데, 뉴스에선 “앞으로 맞이할 여름 가운데 올여름이 그나마 시원한 여름일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예측까지 흘러나온다.
노르웨이 철학자 라르스 스벤젠은 ‘패션은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인 동시에, 사회 구성원으로서 통합적 코드를 반영하는 이중적 과제를 수행한다’고 했다. 즉, 개성을 담아야 하지만 또 너무 튀면 안 된다는 뜻이다. 국내에서도 과거에 비해 자율 복장 근무를 하는 기업이 많이 늘어났다. 하지만 대부분 암묵적인 룰은 있다. 너무 스포티한 스니커즈나 티셔츠는 곤란하고, 반바지는 안 된다. 자유롭게 입되 선을 지키라는 것인데, 사실 그것만큼 어려운 선택도 없다. 여름만 되면 냉감 소재로 중무장한 비슷한 비즈니스룩이 시장에 쏟아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계절 직장인이 출근룩을 고민한다는 것은 단순한 사치가 아니다. 더위 속 쾌적함을 사수하려는 의지이자, 최소한의 품격과 예의를 지켜내려는 눈물겨운 생존 전략이다. 비록 아무도 몰라볼지라도, 오늘 내가 입은 옷은 치열한 고민의 산물이다. 그래서 오늘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내일 출근 땐 뭐 입지?”
에겐남은 플리츠 입고…테토녀는 작업복 걸친다
부드러워진 남성복
최근 이웃 나라 일본에선 도쿄도가 제안한 ‘도쿄 쿨비즈’ 가이드라인이 직장인 드레스코드 찬반 논쟁으로 번졌다. 업무에 따라 반바지 착용을 허용한 것이 불씨가 됐다. 이른바 ‘아저씨의 반바지 논란’이다. “업무 효율을 높인다”는 의견 못지않게 “보기 좋지 않다”는 반감이 팽팽하다. 국내에서도 10여 년 전 ‘반바지 투쟁’으로 비슷한 논쟁을 벌인 바 있다. 반바지 출근 논란이 본격화하는 걸 보니 바야흐로 여름이다. 입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시원해지는 남성 여름 패션 트렌드를 모았다.
올여름 남성 직장인의 가장 큰 고민은 ‘어느 정도로 캐주얼하게 입을 것인지’다. 금융권과 대기업 본사, 법무·컨설팅업계처럼 외부 미팅이 잦은 조직에서는 여전히 어느 정도 격식을 요구한다. 그렇다고 슈트와 긴팔 셔츠를 고집하기엔 한여름 날씨가 가혹하다. 이때 가장 현실적인 해법은 소재를 바꾸는 것이다.
몸에 붙지 않고 통기성이 좋은 리넨은 여름 필수 아이템이지만 쉽게 구겨져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하는 직장인에겐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그 대안은 나일론 혼방, 쿨맥스, 워셔블 울, 경량 폴리에스터 등이다. 과거 아웃도어에 쓰이던 기능성 소재가 비즈니스 캐주얼 시장으로 흘러왔다. 수분을 빨리 말리는 흡습속건 기능이 뛰어난 것이 특징이다.
일정한 간격으로 주름이 잡힌 ‘플리츠’는 올여름 남성복의 치트키로 꼽힌다. 원단이 피부에 닿는 면적을 최소화해 시원한 데다 다림질도 필요 없다. 과거엔 시니어 전유물로 여겨졌으나 최근엔 연령과 관계없이 인기다. 삼성물산 패션부문이 수입하는 ‘옴므 플리세 이세이미야케’는 지난달 매출이 전년 동월 대비 15% 넘게 늘었다. LF의 TNGT도 자체 개발 원단을 적용한 ‘요요기 플리츠’ 출시 물량을 350% 늘렸다.
보수적인 직장이라도 군데군데 캐주얼 아이템을 매치하는 유머는 허용하는 추세다. 위아래 한 벌 슈트 대신 단품 재킷, 폴로 니트, 오픈칼라 셔츠, 핀턱 팬츠를 입는 비중이 늘고 있다. 한 벌 세트를 포기한 만큼 색상은 아이보리와 크림, 베이지와 브라운처럼 같은 계열로 맞추는 편이 현명하다. 땀자국이 신경 쓰인다면 회색보다 네이비, 카키 혹은 스트라이프처럼 표면감이 있는 패턴을 고르는 게 낫다. 슈트에 구두 대신 운동화를 착용하는 스타일은 이제 기본이다.
핏은 자연스럽게 흘러내려야 스타일리시하다. 과거 남성 출근복이 직선적이고 권위적인 인상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면 최근에는 옷이 몸을 조이지 않는 유연함이 중요해졌다. 지오지아 디자인실 관계자는 “슈트 소재로 캐주얼한 블루종 아우터를 구성하거나 플리츠 비즈니스 셋업을 내놓는 등 소재와 아이템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힘 들어간 여성복
프릴과 리본이 달린 파스텔 컬러 블라우스, 허리 라인을 강조한 펜슬 스커트와 원피스. 그간 유행하던 여성 비즈니스 패션의 정석은 이른바 ‘귀엽고 여성스러운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최근엔 일하는 여성이 그 판도를 뒤집었다. 요즘 패션 코드는 ‘워크웨어’로, 현장 작업복처럼 여겨지던 스타일이 여성 오피스룩의 새 문법으로 떠올랐다.
워크웨어는 말 그대로 ‘일하는 옷’이다. 작업복, 유니폼, 카고 팬츠처럼 기능과 활동성을 우선시한 옷에서 출발했다. 물론 투박한 작업복을 그대로 들여온 건 아니다. 실용적인 포켓, 넉넉한 핏 등 일부 디자인 요소를 차용하되 실루엣을 자연스럽게 가리는 형태로 구현된다. 몸을 조이고 여성성을 강조하는 옷보다 훨씬 편하면서도 외근 일정까지 넘나들 수 있어 실용적이다.
트렌드는 명품 런웨이에서 먼저 감지됐다. 미우미우는 2026년 봄여름 컬렉션에서 앞치마형 드레스, 유니폼 등 여성의 노동과 독립성을 상징하는 옷을 전면에 내세웠다. 프라다도 올해 봄여름 다양한 소재와 스타일의 옷을 여러 개 겹쳐 입는 방식의 여성 컬렉션을 선보였다. 전통적 비즈니스 정장의 문법을 따르지 않으면서 현대사회에서 저마다 다른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가는 ‘일하는 여성’의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입체적으로 보여줬다는 게 업계 평가다.
점점 더워지는 여름 날씨와 까다로운 실내 냉방도 워크웨어 확산에 한몫하고 있다. 여성 직장인은 출근길 무더위와 사무실 에어컨 사이에서 급격한 온도 변화, 짧은 여름 옷의 노출 부담을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 민소매만 입으면 실내에서 추울 수 있고 반대로 재킷을 걸치면 한낮의 습도에 답답해진다. 그래서 대안으로 떠오른 게 얇은 셔츠, 경량 아우터, 베스트처럼 내구성이 좋고 가볍게 겹쳐 입을 수 있는 옷이다. 신세계인터내셔날 관계자는 코튼·리넨 혼방으로 가벼워진 여름 니트 셋업과 버뮤다 팬츠, 카프리 팬츠 스타일을 추천했다.
여름 니트도 이런 고민을 잘 반영한 아이템 중 하나다. 기존 니트 소재는 주로 겨울에 쓰였지만 최근엔 코튼·리넨 혼방 소재를 활용해 가볍고 시원해졌다. 노출 부담은 줄이면서 몸에 자연스럽게 흐르는 실루엣을 만들 수 있다. 슬리브리스 니트 톱과 반소매 니트에 같은 계열의 니트 팬츠, 스커트를 맞추면 별다른 장식 없이도 완성도 높은 오피스룩이 된다. 최근 패션업계에서 주목받는 카프리 팬츠도 눈여겨볼 만하다. 종아리 중간 정도까지 내려오는 카프리 팬츠는 자칫 지나치게 캐주얼해 보일 수 있지만, 시스루 셔츠나 리넨 셔츠와 스타일링하면 한층 세련된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다. 여기에 로퍼, 플랫슈즈를 착용하면 트렌디하면서도 단정한 오피스룩으로 활용 가능하다.
안혜원 기자 anh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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