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중산1동. 1기 신도시 일산의 끝자락인 이곳 상가들 곳곳엔 오래전 떠난 점포의 흔적이 남아있다. 왕수학·청운학원·올림피아드수학…. 상가 입구 유리문엔 ‘윤선생영어교실’이란 빛바랜 스티커가 여전히 붙어있지만 그 안은 요양원이다. 그 대비가 묘하다. 트럭에 이삿짐을 싣고 있던 학원 관계자를 붙잡고 여기가 혹시 예전엔 학원가였냐고 물어봤다. “한때는 꽤 학원이 많았던 학원가였다고 이 동네 오래 사신 분이 얘기하더라고요.” 그 영어학원은 신축 아파트가 있는 옆 동네로 이사 간다고 했다.
중산1동은 1기 신도시인 일산에서도 지난 30년 동안 인구 구조가 가장 극적으로 바뀐 동네다. 일산에 속한 모든 동 중에서 이 지역 유소년 인구 비율은 1997년 4위(총 17개 동)→2008년 8위(총 20개 동)→2017년 12위(총 20개 동)→2025년 20위(총 23개 동)로 떨어졌다.
초등학생·중학생 아이 둘과 함께 1995년 입주한 김모(70)씨는 중산마을의 젊었던 시절을 기억한다. “학원이 상당히 많았지. 이 근방에선 중산 학원가가 제일 커서, 저쪽 탄현에서도 애들이 여기로 왔을 정도였어요. 좋은 학원, 시험 봐가지고 학원생을 모집하는 그런 학원들도 많았다니까.”하지만 아이가 줄고 학원도 떠나면서 10년쯤 전부터 요양원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학원이 많이 줄었죠. 후곡 학원가에서 여기까지 학원 셔틀이 다니거든요. 셔틀로 15분이면 가니까, 큰 학원은 거기로 다니죠. 최근 한 달 새 아파트 매매가 2건 있었는데, (매수인이) 모두 60대셨어요. 아무래도 여기가 조용하고 공기 좋고 집값도 저렴하니까.”(일신부동산 공인중개사)1997년부터 중산1동에서 일산문고를 운영해 온 이희주(68) 씨는 지난 9일 ‘경영난으로 7월 20일까지만 영업한다’는 문자를 일부 회원들에게 보냈다. 온라인 시대, 동네서점이 문 닫는 게 그리 새로운 일은 아니다. 그래도 늘 같은 자리를 붙박이처럼 지켜온 100평짜리 서점의 영업 중단 소식은 충격인가보다. 문제집을 계산하던 세 모녀 손님이 이 씨로부터 폐업 소식을 듣고 놀란 듯 몇초간 입을 벌린 채 말을 못했다. 엄마는 “이제 어떡하지?”라며 당황했고, 아이는 “나 이제 문제집 안 사도 돼?”라며 장난쳤다.
“처음 오픈했을 땐 막 사람들이 구경 왔죠. 줄을 서서 계산하고 그랬고. 일산에 이런 큰 서점 자체가 거의 없었으니까. 그 뒤로 한동안은 대형서점이 막 늘어났어요. 정글북, 초원서점. 이젠 다 문 닫았지.”
그 시절 일산문고 주 고객은 학생과 학부모였다. 문제집이 매출의 70~80%를 차지했다. 엄마들은 큰 애를 등교시킨 뒤 작은 애를 유모차에 태운 채 서점에 와서 문제집을 고르곤 했다. 학생들은 오후 하굣길에 들러 소설책을 뒤적거렸다.
“그땐 매출이 괜찮았어요. 지금보다 배 이상 됐죠. 그때 작성한 노트를 보니까, 당시에도 장사가 이렇게나 됐는데 지금은….”
1997년 노트엔 매일의 매출이 빼곡히 기록돼 있었다. 어떤 날은 68만원, 다른 날은 74만원, 많은 날은 100만원도 찍었다. 지금은 매출로 가게 월세 내기도 빠듯한 수준이다. “단골손님한테는 좀 미안하긴 한데, 인건비도 안 나오는 걸 붙잡고 있으면 괜히 시간 낭비만 하는 것 같아서요.”“문 닫자고 결정하셨을 때, 그땐 하루에 손님이 몇 명 정도 왔나요?” 이 질문에 이씨의 표정이 순간 흐려진다. “말하기도 창피할 정도라….”
옛날의 꼬마 단골손님들은 어른이 되면서 일자리를 찾아 다른 동네로 떠났다. 대신 친정에 왔다가 한 번씩 아이 손을 잡고 서점에 들르곤 한다. “아직도 있나 보러 왔어요”라며 반갑게 찾아왔던 그 옛 단골들과도 이젠 이별이다.
임모(65)씨는 1998년 중산1동 대로변 상가 한켠에 작은 슈퍼마켓을 열었다. IMF 외환위기로 실직한 남편과 새로운 동네에서 새롭게 시작했다. 외환위기로 한국 경제가 최악이었던 1998년이지만, 그의 슈퍼마켓엔 손님이 끊이지 않는 풍족했던 시절이었다.
여전히 가게 문은 매일 아침 연다. 하지만 선반은 휑하다. “반품 때문에 물건을 잘 갖다 놓지 않아요. 반품 많으면 눈치 보이니까. 빵은 결국 뺐어요. 요새는 빵집에서 사지 이런 구멍가게에서 안 사. 어떨 땐 반품 안 생기게 하려고 우리가 막 먹는다니까.”
그나마 꾸준한 건 담배 손님이다. 종종 새로운 담배 손님이 찾아오기도 한다. 보통은 새로 이사 온 어르신이다. “여기가 일산의 거의 끝쪽이거든요. 젊은 사람들은 일자리 찾아서 떠났고, 대신 서울에서 집을 팔고 여기로 이사 오는 어르신들이 몇 년 전부터 갑자기 많이 보여요. 집값이 차이 나니까, 집 팔아서 남은 돈 가지고 생활하려는 거지.”
임씨 슈퍼마켓 옆 가게는 공실이다. 언제부턴가 대로변 상가도 군데군데 비어갔다. “옛날엔 1층이 빈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는데. 요즘 여기는 생겼다 하면 요양원밖에 없고…. 요양원이 늘면 장사하는 사람들은 안 좋아요. 어르신들은 소비할 게 없거든.”
그래도 임씨가 장사를 계속 이어가는 건 자기 소유 가게라 임대료 부담이 없어서다. “지금은 뭐 가게 운영이라고도 할 수가 없어요. 그냥 가게 세를 안 내니까, 붙들고 있는 거죠. 30년 가까이 맨날 아침에 눈 뜨면 나온 그 자리를 없앨 수가 없더라고요.”
중산1동은 고층아파트로 가득 들어찬 동네다. 어르신 대부분은 아파트를 자가로 소유하고 있다. 임대아파트가 많은 근처 다른 동네보다 형편은 오히려 나은 편이다. 동네가 지저분해지거나 슬럼화할 일도 없다. 중산1동 행정복지센터 이영재 동장은 “유해환경도 없고, 유동 인구도 많지 않아서 아주 깨끗하고 쾌적한 살기 좋은 환경”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말대로 거리는 정말 깨끗했다. 다만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고 너무 조용하다 못해 적막하다.
동네에 노령층이 갈수록 늘면서 가장 걱정되는 문제는 빈곤보다는 치매 같은 건강 문제, 그리고 고독이다. 행정복지센터의 김현주 사회복지사는 이렇게 말한다. “혼자 남겨지실 경우에 돈이 있는 것과 별개로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크거든요. 그냥 방치해둘 순 없는 문제인 거죠.”
낡은 상가 건물들이 죽 늘어선 대로변에 공사가 한창인 새 건물이 하나 있다. 큰 창문이 있는 주황 벽돌색 5층 건물은 오래된 거리에서 홀로 2020년대 감성을 풍겼다. 언뜻 보면 카페와 음식점이 들어올 것만 같은 외관이지만 아니었다. 중산1동의 유일한 새 건물은 큰 요양원이 될 거라고 했다.
“아직은 괜찮은데 10년 뒤, 20년 뒤엔 이 동네는 어떻게 될까요?” 이틀에 걸친 취재를 마칠 무렵 떠오른 이 질문을 아파트 관리사무소 직원에게 던졌다. “저도 그게 걱정이에요. 지금도 온통 어르신밖에 없는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By.딥다이브
*이 기사는 6월 13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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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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