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햇살은 이글이글, 꽃빛은 타오르는 불길 같구나.
바람에 뒤채어 잠시 어지럽더니, 물에 비치자 다시 곱게 빛난다.
돌아와 창가의 글자를 보아도, 눈앞엔 아직 환한 빛이 가득하네.(夏絛綠已密, 朱萼綴明鮮. 炎炎日正午, 灼灼火俱燃.
翻風適自亂, 照水復成姸. 歸視窓間字, 熒煌滿眼前.)
―‘여름꽃 환하게 피다(하화명·夏花明)’ 위응물(韋應物·약 737∼791)봄꽃만 꽃인 줄 알면 여름꽃이 섭섭하다. 봄꽃은 늘 환대받지만, 여름꽃은 더위와 땀에 밀려 자주 잊힌다. 위응물은 달랐다. 그는 한낮의 꽃에서 여름꽃의 당당한 빛을 보았다. 짙은 녹음 사이에 붉은 꽃이 박혀 있다. 푸른빛이 깊을수록 붉은빛은 더 선명하다. 한낮에도 꽃은 고개를 숙이지 않고 불붙은 듯 피어난다. 바람에 꽃잎은 흐트러지지만, 물에 비치면 그 흔들림마저 풍경이 된다.명나라 왕양명(王陽明)은 꽃을 보지 않을 때는 꽃이 나와 함께 적막 속에 있다가, 내가 보는 순간 비로소 밝아진다고 했다. 김춘수의 ‘꽃’도 그랬다.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던 것이, 이름을 불러 주자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했다. 위응물의 여름꽃도 시인의 시선을 만나는 순간 하나의 사건이 된다. 꽃구경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는데도 창가의 글자가 흐릿하다. 꽃빛이 눈에 남아 아직도 어른거리는 것이다. 올여름 붉은 꽃 한 송이를 만나거든 그냥 지나치지 말 일이다. 바라보는 순간, 그 꽃도 우리에게 와서 하나의 의미가 될지 모른다.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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