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적 폭염에 냉방 수요 폭증
에어컨 설치 놓고 유럽 정치권 충돌… 진보는 반대, 보수는 찬성
佛-獨 선거 핵심 쟁점으로 부상… 美 보수 진영까지 논쟁 가세

에어컨 사용 여부에 따라 이념을 가르는 온라인 게시물이 최근 유럽 소셜미디어를 뒤덮고 있다. 특히 전기를 많이 잡아먹는 에어컨을 사용하는 사람은 극우 추종자라는 근거 없는 주장이 난무하고 있다. 일부 소셜미디어 게시물엔 에어컨에 히틀러의 얼굴을 합성한 이미지도 담겼다.

● ‘에어컨 보급’ 놓고 좌우 대립 벌이는 유럽 정치권

이에 따라 프랑스에선 내년 4월 치러지는 대선의 주요 쟁점 중 하나로 ‘에어컨 규제 해제’가 급부상하고 있다. 프랑스 극우 국민연합(RN)의 마린 르펜 의원은 에어컨 보급 전국 확대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RN 소속 의원인 장필리프 탕기는 “2003년 폭염 이후 대규모 에어컨 설치 계획이 추진됐어야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프랑스에서 (에어컨 사용은) 좌파가 오랫동안 강요해 온 이념적 금기 사항이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진보 진영은 반발하고 있다. 극좌 정당인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LFI)의 장뤼크 멜랑숑 대표는 “전국적인 에어컨 설치 보급은 기후위기를 악화시키는 잘못된 해결책”이라며 대안으로 녹지 확대, 건물 단열 개선을 제안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보수 진영은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 EU가 시행해 온 과도한 녹색 정책을 겨냥한 포퓰리즘 전략으로 에어컨 사용 옹호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고 보도했다.
지난달 28일 동부 브란덴부르크주에서 역사상 최고 기온(41.7도)을 찍은 독일에서도 에어컨을 둘러싼 정치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현재 독일 내 정당 지지율 1위인 극우 성향 독일대안당(AfD) 소속 마르크 베른하르트 건설담당 대변인은 “에너지 효율 등급 같은 ‘기후 히스테리’가 에어컨 설치를 막는 건설 정책을 낳았고, 그 결과 폭염 사망자가 늘고 있다”며 “기후 이데올로기의 제단 위에서 시민들이 희생되는 일을 막겠다”고 주장했다. 극좌 성향 녹색당은 에어컨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지붕에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는 경우에만 에어컨 보조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와 함께 탈탄소 캠페인과 대규모 가로수 식재도 추진 중이다.
이는 유럽 각국 정부의 엄격한 기후 정책으로 인해 환경 보호가 생활문화 전반에 뿌리내린 영향이 크다. 2014년부터 올 3월까지 12년간 연임한 안 이달고 전 파리 시장은 중도좌파 사회당 소속으로 탄소 배출량 감축, 자전거 이용 확대 등 친환경 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폭염 대책에서도 그늘 및 녹지 조성, 급수대 확충 등을 우선시하면서 ‘에어컨 없는 파리’를 내세웠다.
일각에선 대기오염 저감으로 깨끗해진 유럽의 공기가 역설적으로 폭염에 취약하게 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오염 농도가 낮은 맑은 대기에선 일조량이 늘어 지표를 더 잘 데우기 때문이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몇 년간 지지율 하락으로 어려움을 겪어온 녹색 정치인들에게 ‘에어컨 앞에서 좀 시원하게 쉬자’고 말하는 것은 마치 항복 선언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그 발상을 뒤집어야 할 때”라며 “기후 정책의 목표는 누구나 값싸고 친환경적인 에어컨을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 “미국식 여름나기 옳았다”… 美 보수 진영 에어컨 논쟁에 가세유럽 정치권에서 에어컨 논쟁이 불붙자, 오랫동안 유럽에서 ‘환경 파괴범’ 취급을 받아온 미국 보수 진영도 가세하고 있다. 미국의 보수 성향 스탠드업 코미디언인 에린 웩슬러는 “유럽의 폭염은 미국의 총기 폭력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인다. 그런데 당신들은 그렇게 덥지도 않잖아?”라고 비꼬는 숏폼 영상으로 최근 관심을 끌었다. 지난달 30일 유튜브에 게재된 해당 영상은 열흘 만에 85만 회 이상 조회됐고, ‘좋아요’ 4만 개 이상을 얻었다.
미국 유명 경제학자 노아 스미스는 지난달 소셜미디어 X에 “그냥 빌어먹을 에어컨 좀 달아. 할머니 목숨부터 살리라고, 유럽 친구들”이라고 썼다. 이어 “에어컨이 없어서 매년 수십만 명이 죽게 놔둔다고 기후변화를 늦출 가능성은 눈곱만큼도 없다”고 쓴 게시물의 조회 수는 22만 회를 넘겼다. 미국 핀테크 기업 스트라이프의 패트릭 콜리슨 최고경영자(CEO)는 유럽에 에어컨이 드문 이유에 대해 인공지능(AI)이 내놓은 답변을 X에 공유하며 “결국 미국식 여름나기가 맞았음을 인정하기 싫은 마음을 달래려는 정신 승리”라고 비꼬았다.
유럽의 친환경 정책을 향한 미국 언론들의 비판도 이어지고 있다. 워싱턴포스트(WP)는 5일 ‘유럽은 멋지지 않아(Europe isn’t cool)’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유럽 폭염의 “진짜 원흉”으로 문화 보수주의와 과도한 정부 규제를 꼽았다. WP는 “미래 세대를 구하겠다며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을 치명적인 고온에 그대로 노출시키는 건 비현실적인 발상”이라며 “(유럽인들은) 기후 문제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역사적 건축물 보존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정치인들에게 표를 던진다. 이것이 에어컨 설치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날을 세웠다.
미국의 이런 비판에 유럽은 반발하고 있다. 오드리 퓔바르 프랑스 파리시 부시장은 “미국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나라”라며 “설교는 그만하라”고 공개적으로 반박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5일 “미국의 일부 논평가들은 유럽의 낮은 에어컨 보급률을 ‘가난하고 잘못된 정책을 선택했으며 과도한 규제를 하는 대륙’의 증거로 활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유럽과 미국의 이런 논란은 미국 내 정치 양극화가 유럽 폭염을 계기로 재현된 거라는 시각도 있다. 미국 조사기관 퓨 리서치센터는 올 5월 공개한 보고서에서 기후위기에 대한 인식이 정치 성향과 직결되며, 특히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2기 출범 후 이런 인식이 더 양극화했다고 분석했다.
퓨 리서치센터가 미국 성인 352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민주당 지지자들이 공화당 지지자들보다 기후변화로 인한 피해를 비관적으로 인식할 가능성이 훨씬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민주당 지지자 및 진보 성향 유권자 60%가 기후변화를 ‘오늘날 미국이 직면한 매우 큰 문제’로 봤고, 10명 중 9명은 이에 대응할 ‘정부의 노력이 미흡하다’고 답했다. 반면 공화당 지지자 및 보수 성향 유권자 중에선 22%만이 기후변화가 미국인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고 응답했다.
퓨 리서치센터는 “기후변화 비관론의 확산은 트럼프 행정부가 국제 기후변화협약 탈퇴, 이산화탄소 배출 제한 완화, 연료소비효율 기준 완화 같은 조치로 기후 정책을 재편한 시점과 맞물린다”며 “기후변화가 지역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견해는 응답자가 미국 남부에 사는지, 북동부나 서부에 사는지 등 지리적인 요건보다는 정치 성향에 훨씬 큰 영향을 받는다”고 분석했다.
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파리=유근형 특파원 noe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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