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마음속에 유토피아 하나쯤은 품고 산다. 유토피아는 그리스어로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모든 것이 완벽하고 평화로운 이상향을 뜻하지만, 동시에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예술은 이 ‘어디에도 없음’의 이상을 ‘지금, 여기(now, here)’라는 순간으로 불러내어 잠시나마 현실 속에 펼쳐 보인다.
하지만 이 이상향은 혼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를 지키면서도, 끊임없이 다른 자극을 받고 충돌하고 소통하며 다듬어진다. 음악은 고유의 소리를 가진 여러 악기가 불협화음을 극복하고 조화를 이루며 합주할 때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 낸다. 공연예술도 마찬가지다. 개성 강한 여러 명의 배우와 스태프들이 함께 끈끈한 호흡 속에서 무대를 완성한다.
그렇다면 미술은 어떨까? 시각 예술가들은 평소 고독한 작업자로 기억되지만, 실제로는 이들 사이에도 활발한 교류와 협업이 존재한다. 그 중심에는 ‘레지던시’가 있다. 레지던시는 예술가들이 낯선 환경에서 머물며 작업하고 연구하며, 서로의 경험과 생각을 나누며 새로운 영감을 얻는 공유 공간이자 연결의 장이다. 쉽게 말해 '예술가 버전 셰어하우스'라 할 수 있다. 이곳에서 예술가들은 작업 공간도 함께 쓰고, 밥도 같이 먹고, 때로는 새벽까지 작업 이야기로 토론을 벌이기도 한다. 이러한 일상에서 “어? 너 그런 방식으로 작업하는구나”, “이런 재료도 있었네?” 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혼자였다면 절대 몰랐을 새로운 아이디어가 툭 튀어나오고, 생각하지도 못한 협업이 시작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처럼 중요한 역할을 하는 레지던시들이 지금 위기에 처해있다. 최근 몇 년 사이, 경기창작센터, 가창창작스튜디오, 서교예술실험센터 등 각 지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레지던시들이 잇따라 문을 닫거나 축소되었다. 예산 삭감으로 인해 예술가들의 실질적인 창작 지원이 약화하는 등, 예술 생태계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시설 축소를 넘어, 신진 작가들이 동료들과 교류하며 성장할 수 있는 토양 자체를 잃게 만든다는 점에서 더 큰 우려를 낳는다. 예술가들이 서로에게서 배우고 영감을 얻으며 발전해 나가는 순환 고리가 끊어질 위험에 처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적인 움직임이 있다. 개별 레지던시에서의 작은 '합주'들이 한데 모여 더 큰 오케스트라를 이루는 현장이 바로 지금, 이곳에서 펼쳐지고 있다. 대구예술발전소에서 열린 레지던시 연합 교류전인 <N O W H E R E>는 창동레지던시(국립현대미술관)부터 수원아트스튜디오 푸른지대창작샘터(수원문화재단), 화이트블럭 천안창작촌(뮤지엄호두), 이응노의 집 창작스튜디오(고암 이응노 생가 기념관),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청주시립미술관), 대구예술발전소(대구문화예술진흥원), 달천예술창작공간(달성문화재단), 북구예술창작소 소금나루2014(플랜디파트), 팔복예술공장(전주문화재단), 호랑가시나무 창작소(아트주)까지 전국 9개 지역에서 온 74명의 예술가들이 참여했다.
전시에는 자아, 사물, 경계, 일상, 기억, 가상, 생태, 관계까지 총 8가지 주제가 담겼다. 어려워 보이지만, 사실 우리가 매일 고민하는 것들이다. 이는 우리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더 나은 사회와 환경을 만들어갈지 함께 고민하는 질문들이다.
전시를 통해 정답을 얻을 수는 없다. 하지만 각 주제 속에서 작가들이 풀어낸 저마다 다른 시선과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자기만의 이야기와 감각을 살펴볼 수 있다. 어떤 작가는 사회를 향해 강하게 목소리를 내고, 또 다른 작품은 개인의 작은 감정과 기억에 집중한다. 그 표현이 때로는 선명하고 때로는 모호해서, 관객이 직접 해석해야 하는 여지를 남겨두기도 한다.
전시는 일방통행 동선으로 구성되어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작품이 내뿜는 서로 다른 질문과 감정, 이야기들이 교차하며 관객을 새로운 사유의 흐름에 초대한다. 마치 소설을 읽듯, 앞 작품과 뒤 작품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 생각해보면 더 재미있다. 이렇게 작품들 사이를 거닐다 보면 각기 다른 예술적 문장들이 하나의 큰 이야기로 어우러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전시의 마지막인 옥상 정원은 작품이 없는 빈터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도시 풍경과 바람, 창들 사이를 지나며 우리 일상과 시선이 자연스레 펼쳐진다. 전시장에서 봤던 작품들의 이야기가 일상 속 수많은 창과 시선 속에 겹치는 순간이다. 예술이 비일상 공간에서 펼쳐지다가 다시 일상으로 스민다는 의미를 조용히 전하는 공간이다.
이 전시는 고독하게 작업하는 예술가의 신화에 도전한다. 혼자 고독하게 작업하는 천재 예술가 이미지는 이제 옛날이야기다. 요즘 예술가들은 함께 밥 먹고, 서로 아이디어를 나누고, 때로는 실패도 함께 웃어넘기며 작업한다. 그런 일상적이고 인간적인 모습이 오히려 더 매력적이다. 이 전시는 예술이 어떻게 사람과 사람, 공간과 시간을 연결하고 새로운 가능성의 장을 열 수 있는지 보여주며, 예술이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전시장에서 우리는 예술의 '유토피아'가 먼 이상향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현실임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예술은 다른 세계의 문이 아니라 우리 일상의 일부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관람객 역시 예술 생태계의 중요한 구성원이 되고, 언젠가 우리가 사는 동네에서도 이런 예술가들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했던 특별한 예술의 현장이 바로 지금, 이곳에서 우리와 함께 숨 쉬고 있다.
정연진 독립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