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의 기록[내가 만난 명문장/이정화]

2 days ago 3

“집에서 나오려면 그 수밖에 없었어요.”

―제프리 유제니디스 ‘버진 수어사이드’ 중

이정화 민음사 해외문학팀 팀장

이정화 민음사 해외문학팀 팀장
그날 아침은 리즈번가(家)에 남은 마지막 딸이 자살할 차례였다. 이번엔 메리였고, 터리즈처럼 수면제를 삼켰다. 처음은 막내 서실리아였다. 하지만 서실리아가 왜 자살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 작품은 리즈번가의 다섯 딸이 모두 자살한다는 결말을 먼저 밝힌 후, 이제는 중년이 된 동네 소년들이 그녀들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찾기 위해 다시 뭉친다는 설정으로 시작한다. ‘우리’로 지칭되는 화자는 그녀들이 남긴 물품과 추억을 회상하고, 당시 이웃을 만나 자매들에 관한 이야기들을 수집한다. 마을 사람들은 딸들의 죽음이 부모 책임이라고 했다. 언론은 가족의 심기는 개의치 않고 부모와의 인터뷰를 시도했다. 흑마술, 악마주의, 자살 모방설도 유포했다. 서실리아가 떠난 후 리즈번 가족은 점점 더 폐쇄적으로 변해 갔다. 엄마는 딸들에게 금욕적이고 억압된 일상을 강요했고, 무기력한 아빠는 그 상황을 그저 방치했다. 부모는 자매들을 바깥세상과 완전히 단절시켰고 주변의 편견과 배타적 시선은 가족을 점점 더 고립시켰다.

나팔바지, 장발, 마리화나, 트랜스앰 스포츠카 등이 유행하던 1970년대. 반전 운동과 히피, 흑인 인권과 성 해방, 로큰롤 등으로 저항하던 청년 세대의 저항은 10대의 치기 어린 자살 소동으로 치부된 리즈번가의 딸들처럼 인종폭동, 오일쇼크, 불황의 파도 밑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하지만 이들 세대는 어른이 돼서도 그 시절을 애도하고 기록한다. 럭스의 말처럼 리즈번가의 다섯 자매는 살기 위해 죽었다. 어른의 억압, 주변의 배타적 시선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그런 소녀들을 구하지 못했던 소년들은 말한다. 우리는 그녀들을 사랑했고 거기서 나오라고 부르고 있었다고, 퍼즐을 완성할 조각들을 영원히 찾아낼 수 없는 그곳에서 얼른 나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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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화 민음사 해외문학팀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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