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스를 품은 동화마을, 슬로베니아 블레드

1 week ago 16

[재이의 여행블루스] 웅장한 풍경과 중세 도시 정취… 숨은 보석 같은 여행지

블레드 호수 한가운데 떠 있는 블레드섬.  GETTYIMAGES

블레드 호수 한가운데 떠 있는 블레드섬. GETTYIMAGES
호수 위에 작은 섬 하나가 떠 있다. 섬 가운데에는 뾰족한 종탑이 하늘을 향해 솟아 있고, 뒤로는 알프스산맥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다. 마치 동화책 속 삽화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풍경이다. 슬로베니아 북서부에 자리한 블레드(Bled)는 여행자들이 평생 한 번쯤은 꼭 가보고 싶어 하는 여행지 가운데 하나다.

블레드가 자리한 슬로베니아는 중부 유럽에 위치한 나라다. 북쪽으로 오스트리아, 서쪽으로는 이탈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국토 대부분이 산과 숲으로 이뤄져 있다. 알프스산맥 남동부인 율리안알프스의 웅장한 풍경과 중세 도시 정취를 동시에 품고 있어 여행자 사이에서는 오래전부터 숨은 보석 같은 여행지로 유명했다.

특히 수도 류블랴나에서 자동차로 1시간가량 떨어진 블레드는 슬로베니아를 대표하는 관광지이자 휴양지다. 한국에서 블레드를 찾는 여행자는 보통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주요 도시를 경유해 류블랴나로 들어간다. 직항 노선이 없지만 이동 자체는 어렵지 않다. 류블랴나에 도착한 뒤 버스나 렌터카를 이용하면 1시간여 만에 블레드에 닿을 수 있다.

‘알프스의 푸른 눈동자’ 블레드 호수

도시를 벗어나 알프스 산자락으로 들어설수록 창밖 풍경은 점점 푸르게 변하고, 어느 순간 에메랄드빛 호수가 모습을 드러낸다. 블레드 호수는 약 1만4000년 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뒤 형성된 빙하호다. 알프스 만년설과 지하수가 모여 만들어낸 맑은 물은 계절, 날씨에 따라 다양한 색으로 변한다. 햇살 좋은 날에는 짙은 에메랄드빛을 띠고, 흐린 날에는 깊고 차분한 청록색으로 변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블레드 호수를 ‘알프스의 푸른 눈동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호수의 가장 큰 매력은 단연 한가운데 떠 있는 작은 섬이다. 슬로베니아에서 유일한 자연 섬으로 알려진 블레드섬에는 성모승천교회가 자리하고 있다. 섬으로 들어가려면 플레트나로 불리는 전통 목선을 타야 한다. 길쭉한 나무배에 승객 10여 명이 오르면 뱃사공은 뒤쪽에 선 채 노 2개를 저어 천천히 배를 움직인다. 모터 소리가 없는 호수는 놀라울 만큼 고요하다.

수백 년 동안 이어져온 이 플레트나 문화는 블레드만의 독특한 전통으로 남아 있다. 과거 합스부르크 왕가(13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오스트리아를 거점으로 중부 유럽의 패권을 휘어잡았던 가문)가 블레드를 휴양지로 이용하던 시절, 자연 훼손을 막고자 운항 배의 수를 제한하는 대신 뱃사공의 권리를 세습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고 전해진다.

섬에 도착하면 99개 돌계단이 여행자를 맞이한다. 이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바로크 양식 교회가 모습을 드러낸다. 하얀 종탑이 인상적인 이 교회는 수세기 동안 순례자와 여행자의 발길이 이어져온 곳이다. 오래전부터 신랑이 신부를 안고 계단을 모두 오르면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한다는 전설이 전해져 지금도 많은 커플이 이곳을 찾는다.

블레드섬에 들어가기 위해 타야 하는 전통 나무배 플레트나. GETTYIMAGES

블레드섬에 들어가기 위해 타야 하는 전통 나무배 플레트나. GETTYIMAGES
호수를 내려다보기 가장 좋은 장소는 블레드성이다. 약 100m 높이 절벽 위에 세워진 이 성은 슬로베니아에서 가장 오래된 성으로 알려졌다. 1000년 넘는 세월 동안 이곳을 지켜온 성벽 위에 올라서면 블레드의 동화 같은 풍경이 한눈에 펼쳐진다. 푸른 호수와 섬, 붉은색 지붕 일색인 마을, 그리고 멀리 보이는 율리안알프스 능선까지 한 장의 그림처럼 이어진다.

블레드의 진짜 매력은 호수 주변을 천천히 걸을 때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 호수 둘레에 형성된 약 6㎞ 산책로는 누구나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다. 백조가 유유히 떠다니는 호수는 시간대에 따라 표정이 조금씩 달라진다. 오전에는 투명한 빛이 물 위를 비추고, 오후에는 산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지며 전혀 다른 풍경을 만든다.

평온함이 주는 편안함

시간 여유가 있다면 둘레길 중간에서 오이스트리차 전망대로 향하는 짧은 트레킹 코스에 도전해보자. 정상까지는 20~30분 정도 오르막길이 이어지지만 그 수고를 잊게 만드는 절경이 기다린다. 전망대에 오르면 블레드 호수 전체가 발아래 펼쳐진다. 그 가운데 떠 있는 블레드섬과 교회 종탑, 절벽 위 블레드성, 그리고 멀리 알프스산맥까지 한눈에 담긴다.

블레드가 오랫동안 여행지로 사랑받아온 것은 풍경 때문만은 아니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분위기도 큰 매력이다. 봄에는 녹아내린 설산의 물이 호수를 채우면서 생기를 불어넣고, 여름에는 수영과 카약, 패들보드를 즐기는 사람으로 북적인다. 가을에는 알프스 숲이 붉고 노랗게 물들면서 호수 전체가 거대한 풍경화처럼 변하고, 겨울에는 눈 덮인 산과 얼어붙은 호수가 만들어내는 고요한 풍경이 펼쳐진다.

블레드에서는 벤치에 앉아 호수를 바라보고, 천천히 걸으면서 풍경을 눈에 담으며, 섬을 향해 움직이는 작은 배 한 척, 산자락을 따라 흐르는 구름, 물결 위로 반짝이는 햇살 같은 장면들을 기억에 새기면 된다. 평온함이 주는 편안함은 시간을 확인하는 일조차 잊게 만든다.

재이 여행작가는…
세계 100여 개국을 여행하며 세상을 향한 시선을 넓히기 시작했다. 지금은 삶의 대부분을 보낸 도시 생활을 마감하고 제주로 이주해 글을 쓰고 사진을 찍으며 다양한 여행 콘텐츠를 생산하는 노마드 인생을 살고 있다.

《이 기사는 주간동아 1547호에 실렸습니다》

재이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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