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지는 인간에게 치명적인 질병을 더 빨리 더 쉽게 찾아내려는 과학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귀지의 화학 성분을 분석해 질병 진단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있는 과학자들을 영국 BBC가 소개했다.
귀지란 무엇인가?
귀지는 고막 바깥쪽 외이도의 두 가지 샘, 즉 귀지 샘과 피지 샘의 분비물이 섞인 것이다. 이 물질은 컨베이어 벨트의 동작 원리처럼 피부 세포에 달라붙어 귀의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이동한다. 이동 속도는 하루 약 20분의 1㎜이다.귀지의 주된 기능은 외이도를 깨끗하고 촉촉하게 유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세균, 곰팡이, 곤충과 같은 이물질이 뇌 속으로 침투하는 것을 막는 역할도 한다.
불쾌한 신체 분비물로 외면 받던 귀지에 대한 인식이 최근 바뀌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귀지가 놀랍도록 많은 생체 정보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10년 도쿄공업 대학교 연구진은 침습적 유관암(가장 흔한 유방암) 환자들은 유방암이 없는 여성보다 젖은 귀지의 특성을 결정하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을 확률이 77% 더 높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귀지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 여부는 물론 제1형 당뇨병인지 제2형 당뇨병인지도 알려줄 수 있다. 혈액 검사가 더 쉽긴 하지만 귀지를 통해 특정 유형의 심장 질환을 진단할 수도 있다.
희귀병 메르니에병의 지표
희귀병인 메니에르병도 귀지를 통해 알 수 있다. 현기증과 청력 손실을 유발하는 내이 질환인데, 메니에르병 환자의 귀지에선 건강한 대조군보다 세 가지 지방산 수치가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발견한 미국 루이지애나주립 대학교 환경화학자 라비 앤 무사(Rabi Ann Musah) 교수는 “특정 질병의 지표로 사용할 수 있는 귀지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혈액, 소변, 뇌척수액과 같은 일반적인 생물학적 체액으로는 진단하기 매우 어렵고, (질환 자체가) 드물기 때문에 진단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질병에 집중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귀지가 이렇게 중요한 건강 정보를 풍부하게 담고 있는 이유는 뭘까?핵심은 귀지 분비물이 체내에서 일어나는 화학 반응, 즉 사람의 신진대사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귀지, 암 관련 27가지 화합물 내포
연구자들은 귀지에서 암 진단의 ‘지문’역할을 하는 27가지 화합물을 발견했다.
“생물의 많은 질병은 대사 질환이다. 당뇨병, 암, 파킨슨병, 알츠하이머병이 그 예다”라고 브라질 고이아스 연방 대학교 화학과 넬슨 로베르토 안토니오시 필류(Nelson Roberto Antoniosi Filho) 교수가 말했다. “이러한 경우, 지질, 탄수화물, 단백질을 에너지로 전환하는 세포 소기관인 미토콘드리아가 건강한 세포의 미토콘드리아와 다르게 기능하기 시작한다. 미토콘드리아는 다른 화학 물질을 생성하기 시작하며, 심지어 다른 물질 생성을 중단할 수도 있다.”
안토니오시 필류 교수와 동료들은 귀지가 혈액, 소변, 땀, 눈물과 같은 다른 체액보다 이처럼 다양한 물질을 더 많이 농축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귀지는 생성 돼 밖으로 배출되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장기적인 변화를 포착하기에 좋은 물질이라고 전문가들은 설명한다.
안토니오시 필류 교수는 귀지 속 27가지 화합물의 분자 농도를 통해 누군가가 암(림프종, 암, 백혈병 중 하나)을 가지고 있는 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방법을 2019년 찾아냈다. 하지만 암의 특정 유형을 구별할 수 는 없었다. 이는 이 분자들이 모든 종류의 암 세포에 의해 생성되거나 이에 대한 반응으로 생성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안토니오시 필류 교수는 현재 암 세포의 독특한 대사의 일부로 독점적으로 생성되는 휘발성 유기화합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귀지를 활용해 암 전(前)단계에서 발생하는 대사 장애를 검출하는 데 연구를 집중하고 있는 것. 그는 “암은 1기에 발견하면 완치율이 최대 90%에 달하기 때문에 암 전 단계를 진단하면 치료 성공률이 훨씬 더 높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안토니오시 필류 교수 연구실은 파킨슨병이나 알츠하이머병과 같은 신경 퇴행성 질환의 발병으로 인한 대사 변화도 귀지를 활용해 측정할 수 있는 지 연구하고 있지만 아직 초기 단계다.
그는 귀지의 화학적 구성 요소를 분석하여 질병 진단에 활용하는 기술인 귀지분석(cerumenogram)을 의료 현장에서 정기적으로 실시하여, 소량의 귀지로 당뇨병, 암, 파킨스병, 알츠하이머병과 같은 질병을 동시에 진단하고 다른 질환으로 인한 대사 변화도 평가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실제 브라질의 한 병원에선 귀지 분석을 암 진단 기술로 도입했다.
영국 맨체스터 대학교의 화학자인 페르디타 배런(Perdita Barran) 교수는 귀지 연구의 유용성을 인정했다.
귀지를 전문적으로 연구하진 않지만 생물학적 분자를 분석하고 질병 진단에 사용할 수 있는 지 연구하는 배런 교수는 “혈액에서 발견되는 화합물은 수용성인 반면, 귀지는 지질이 매우 풍부한 물질이고 지질은 물을 좋아하지 않는다”며 “따라서 혈액만 연구하면 전체 그림의 절반만 볼 수 있다. 지질은 탄광의 카나리아와 같다. 지질은 질병이나 이상 징후를 가장 먼저 감지할 수 있는 물질이다”라고 설명했다.
박해식 기자 pistol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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