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수칙 어기면 근로자도 처벌…싱가포르 산재사망 80%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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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수칙 어기면 근로자도 처벌…싱가포르 산재사망 80% 줄었다

지난 2일 싱가포르 고급 주거지역인 탕린 주변의 한 아파트 건설 현장. 최고 48층, 5개 동을 짓는 공사 현장에 들어서자 “안전 책임이 누구에게 있나. 바로 당신”이라고 적힌 안내문이 눈에 들어왔다. 건설 현장 입구에만 안전을 강조한 안내문이 8개나 붙어 있었다. 시공 건설사 팀빌드의 림이홍은 “사고 발생 땐 현장 근로자까지 예외 없이 책임을 진다는 의미”라고 했다.

싱가포르는 산재 예방 모범 국가로 꼽힌다. 2004년 10만 명당 4.9명이던 산재 사망률을 지난해 0.96명으로 낮췄다. 그 배경에는 2006년 시행된 WSH법(산업안전보건법)이 있다.

“위험을 발생시킨 당사자가 안전을 책임진다”는 원칙에 따라 발주처나 사업주뿐 아니라 근로자에게도 안전에 관한 법적 의무를 부여한 것이 핵심이다. 발주처, 시공사 업주, 근로자 모두에게 적용된 ‘3중 안전 체계’가 산재 급감의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안전 안 지키면 근로자도 징역형

WSH법의 핵심은 근로자 처벌 조항이다. 안전 수칙을 위반한 근로자에겐 5000싱가포르달러(약 580만원)의 벌금이 부과된다. 사고로 이어지면 벌금이 3만싱가포르달러(약 3500만원)로 뛰고, 6개월 이하 징역형까지 선고된다. 과태료에 그치는 한국과 처벌 수위부터 다르다.

강력한 법 집행은 근로자의 자발적인 참여를 끌어냈다. 공사 현장에서 근로자들은 위험 요소를 발견하면 즉시 QR코드를 통해 익명 제보한다. 보고자 신원은 관리자에게 공개되지 않는다. 팀빌드 관계자는 “근로자가 스스로 안전을 챙기는 마인드셋이 산재를 줄이는 가장 강력한 동인”이라고 설명했다.

안전수칙 어기면 근로자도 처벌…싱가포르 산재사망 80% 줄었다

◇AI가 헬멧 미착용 잡아내

그렇다고 안전 책임 모두를 근로자에게 떠넘기는 건 아니다. 현장 곳곳에는 스마트 안전 기술이 촘촘하게 적용돼 있었다. 중장비에는 근접 센서가 부착돼 작업자가 일정 거리 이내로 접근하면 즉각 경보를 울린다. 작업자가 전방 시선을 놓치거나 졸음 기미를 보여도 경고음을 낸다. 인공지능(AI)을 장착한 이동식 CCTV는 현장을 돌며 헬멧 미착용자와 위험 구역 접근자를 실시간으로 골라낸다. 2024년 6월부터 500만싱가포르달러(약 58억원) 이상 건설 프로젝트에 CCTV 설치가 의무화된 결과다.

안전수칙 어기면 근로자도 처벌…싱가포르 산재사망 80% 줄었다

인력 관리도 철저하다. 태블릿PC를 든 안전관리자가 작업자 ID카드를 뒤에 갖다 대자 화면에 인적 사항과 안전교육 이수 내역이 떴다. 발주처인 HDB 관계자도 현장에 상주하며 안전 여부를 함께 점검한다.

◇촘촘한 인센티브 구조

기업이 안전을 ‘비용’이 아니라 ‘투자’로 인식하게 만든 건 정부의 정교한 인센티브 설계가 한몫했다. 5000만싱가포르달러(약 580억원) 이상 공공 프로젝트에서 안전 우수 평가를 받은 시공사는 계약금의 최대 0.5%를 보너스로 받는다.

기업 안전 역량을 1~5단계로 인증하는 비즈세이프 참여 기업에는 대출 심사 가점과 저금리 혜택을 부여한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기업은 4만9000곳에 달한다. 한국은 ‘클린 사업장 보조금’ 제도로 안전 설비 구매 비용을 지원해주는 정도다.

처벌 잣대도 다르다. 싱가포르 정부는 안전 위반 사항이 발견되면 처음엔 시정 조치를 내린다. 이후 벌금을 거쳐 반복 위반 시 일부 구역에 작업 중지 명령을 내린다. 전체 현장을 거의 멈춰 세워 기업에 막대한 손실을 입히는 한국식 규제와는 차이가 크다.

다른 주요 선진국도 사후 처벌이 아니라 예방에 초점을 두고 있다. 영국 보건안전청은 기업이 위험을 스스로 통제하도록 유도하는 ‘자율 책임관리’ 방식을 채택하고 독일은 업종별 산재보험조합이 처벌 대신 기술 컨설팅 위주로 사업장을 지원한다. 일본도 법 위반이 적발되면 시정 권고를 먼저 내리고 사업주의 고의·중과실이 확인될 때만 형사 처리로 전환한다.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 안전공학과 교수는 “싱가포르는 비즈니스를 하려면 안전 법규를 지키는 것이 이득이라는 인식이 기업뿐 아니라 근로자 모두에게 뿌리 깊게 박혀 있다”고 했다.

싱가포르=양길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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