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정마에보다 앞서 바그너 오페라 전곡 지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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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하는 지휘자 정민 / 사진 제공. 강릉시립교향악단.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하는 지휘자 정민 / 사진 제공. 강릉시립교향악단.

대한민국 클래식 음악계에서 '정명훈'이라는 이름은 개인을 넘어 하나의 브랜드다. 세계 유수의 오페라 극장과 주요 오케스트라를 거쳐, 이탈리아 밀라노 라스칼라 극장의 음악감독에 이르기까지 그의 경력은 언제나 한국 지휘사의 정점으로 기록돼 왔다. 이 위대한 지휘자의 시간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 있다. 막내아들 정민이다. 2022년부터 강릉시립교향악단의 포디엄에 서 온 그는 이제, 자신이 이끄는 악단의 연주로 실력을 증명해야 하는 음악감독이 됐다.

정민과 정명훈 부자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또 다른 분야의 ‘국민 부자’를 떠올리게 한다.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99골을 넣으며 한국 축구의 신화를 쓴 차범근, 그리고 그 거대한 이름 앞에서 끝내 자기 몫의 커리어를 완주한 아들 차두리다. 차두리의 은퇴식에서 두 부자가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던 장면은, ‘비록 아버지를 넘어서지 못해도 자기 길을 끝까지 걸어낸 아들의 순간’으로 많은 이의 기억에 남아 있다. 어쩌면 지휘자 정민이 무대에 오를 때마다 느껴지는 감정 역시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이름 앞에서 주눅 들기보다 묵묵히 자신만의 템포로 무대를 이끌어가고 있다.

오페라 나비부인을 선정한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지휘자 정민 / 사진 제공. 강릉시립교향악단.

오페라 나비부인을 선정한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지휘자 정민 / 사진 제공. 강릉시립교향악단.

23일, 정민은 2022년부터 이끌어 온 강릉시립교향악단과 함께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을 콘서트 버전으로 무대에 올렸다. 공연 당일, 무대 리허설을 마치고 나온 그를 만나 지휘자로서 악단과 음악을 대하는 그의 진심을 들을 수 있었다.

정민은 올해 첫 정기연주회 프로그램으로, 교향곡을 선택하는 여느 시향과 달리 오페라를 올린 이유를 ‘경험의 축적’이라고 정의했다. 지난해 콘서트 버전으로 선보인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가 매진을 기록했고, 현장에서 확인한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을 이어가고 싶었다는 것이다.

“오늘 공연하는'나비부인'은 두 회차 모두 매진됐지만, 만일 네 번을 했어도 매진됐을 거예요.”
자신감을 나타낸 그의 말은 강릉 시민들이 그와 시향에 보내는 열렬한 지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오페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는 지휘자 정민 / 사진 제공. 강릉시립교향악단.

오페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는 지휘자 정민 / 사진 제공. 강릉시립교향악단.

“이 작품은 특히 산과 바다를 배경으로 한 정서가 지금 우리가 공연을 준비하고 있는 강릉과 잘 맞아떨어진다”며 작품 선정 이유를 덧붙였다. 실제로 일본 나가사키 항구를 배경으로 미 해군 대위 핑커톤과 열다섯 살의 게이샤 초초상(나비)의 비극적 사랑을 그린 이 오페라는 강릉이라는 도시와 자연스럽게 겹쳐 보였다. 공연 3막에서 핑커톤을 태운 배가 돌아오는 장면에 송출된 ‘일렁이는 바다’ 영상은, 인터뷰를 마친 뒤 잠시 마주한 강릉 앞바다를 떠올리게 할 만큼 시공간적 닮음을 지니고 있었다.

정민은 교향곡이 아니라 '콘서트 오페라'를 올해 첫 정기연주회로 선택한 이유를 설명하며 “We have to be ready for anything”이라고 말했다. "푸치니 오페라는 오케스트라를 한층 유연하게 만들고, 무대 위에서 어떤 변수에도 대처할 수 있는 감각을 길러준다"고 했다. 그러면서 세계적 마에스트로들이 오케스트라를 단련해온 전통적 방식이 시대를 관통해 지금도 유효하다고 덧붙였다.

“오케스트라 발전을 위해 오페라와 심포니를 병행한 세계적 지휘자들의 방식은 지금도 옳다.”

오페라 피트와 심포니 무대를 오가며 악단 역량을 끌어올린 세계적 거장들의 방법론에 대한 확신이었다. 이번 공연을 위해 그는 일주일간 오전 10시부터 밤 10시까지 고강도 리허설을 감행했다. 지난해 콘서트 버전으로 선보인 '라 트라비아타'에 이어 '나비부인'까지, 콘서트 오페라를 단발성 프로젝트가 아니라 강릉시향 대표 브랜드로 만들기 위한 과정이기도 했다.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는 강릉시향 지휘자 정민 / 사진 제공. 강릉시립교향악단.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는 강릉시향 지휘자 정민 / 사진 제공. 강릉시립교향악단.

“피트 안에서는 숨을 공간이 있지만, 무대 위에 서면 표정 관리부터 동작 하나까지 숨길 수가 없어요. 그래서 콘서트 오페라는 굉장히 좋은 훈련입니다.”

콘서트 오페라는 오케스트라가 피트로 들어가는 정통 오페라와 달리,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성악가의 음악적 상호작용을 무대 위에서 고스란히 관객에게 보여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동시에 그만큼 지휘자와 단원들에게는 부담이 따르는 형식이기도 하다.

“강릉이라는 도시와 이 오케스트라는 마치 저를 위한 맞춤 정장 같아요.”
성공적인 공연을 위해 예정에 없던 연습도 이견 없이 받아들일 만큼 단단해진 신뢰 관계에 대해 그는 이렇게 소개했다. 처음에는 기대치가 낮았지만, 단원들과의 호흡이 쌓이면서 더 큰 프로젝트와 더 밀도 높은 연습이 가능해졌다는 이야기다. “사실 직접 만나기 전에는 몰라요.”라며 지휘자와 악단의 첫 만남을 소개팅에 비유한 그의 말은, 지난 5년간 축적된 시간이 만들어낸 신뢰를 압축한다.

인터뷰에 앞서 들을 수 있었던 무대 리허설에서 정민은 단원들에게 “저를 믿고 소리를 더 내주세요”라고 소리치며 푸치니 특유의 끓어오르는 드라마적 사운드를 끌어냈다. 오케스트라를 향해 "Dolce(우아하게)"를 주문하고, "Perfect"라고 외치며 엄지를 치켜세우고, "자~ 감사합니다”라는 말로 연습을 마무리하는 젊은 지휘자의 뒷모습에는 노련함이 배어 있었다.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에서 바그너 오페라에 대한 계획을 설명하는 지휘자 정민 / 사진 제공. 강릉시립교향악단.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에서 바그너 오페라에 대한 계획을 설명하는 지휘자 정민 / 사진 제공. 강릉시립교향악단.

“제 다음 목표는 강릉이라는 도시 자체를 한국의 바이로이트로 만들고 싶습니다.”

정민의 꿈은 강릉시향을 ‘인정받는 오케스트라’로 만드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그의 시선은 이미 다음 단계로 향해 있다. 다음 프로젝트는 바그너의 대작 <니벨룽의 반지> 전곡 콘서트 오페라다. 연출, 성악가, 기술 스태프까지 모두 순수 한국인으로 구성된 최초의 링 사이클을 기획 중이다. 단순한 레퍼토리 도전이 아니라, 강릉이라는 도시의 공연 제작 역량을 국내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선언이다.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하는 지휘자 정민 / 사진 제공. 강릉시립교향악단.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하는 지휘자 정민 / 사진 제공. 강릉시립교향악단.

지휘자 정민은 이 프로젝트를 스스로 “The First Korean Ring(최초의 한국산 반지)”라고 부른다. 위대한 아버지의 이름 앞에서 그는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자신만의 속도로 앞으로 나아가는 중이다.

조동균 기자 chodog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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