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단 두 글자로 이뤄진 단어지만, 이보다 우리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말이 또 있을까. 춤을 추며 살아온 내 삶은 혼자가 아니라 다른 이들과의 인연으로 성장해왔다. 무대 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 무용수지만 그 뒤엔 늘 수많은 손길이 있었다. 함께 믿고 달려주는 동료들, 길을 만들어주는 선생님, 그리고 묵묵히 무대를 완성해준 스태프들. 그들과의 인연이 내 춤의 결을 만들고, 삶의 방향과 철학을 곧게 세워줬다.
이제 나는 무대 위가 아니라 무대 아래에서 춤을 춘다. 토슈즈를 벗고 무대 아래로 내려왔을 때 비로소 보이는 세계가 있다. 무용수로서의 ‘전반전’이 내 삶의 모든 순간을 표현하는 시간이었다면, 예술감독으로서의 ‘후반전’은 그 삶을 다시 누군가의 무대에 오롯이 되돌려주는 과정이다. 예전엔 단 한 번의 완벽한 동작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았다면, 이제는 그 한 동작이 완성되기까지의 수많은 순간을 바라본다.
공연은 인내의 시간으로 만들어진다.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의 수많은 시행착오의 시간, 숨을 고르고 서로의 호흡을 맞추는 시간. 그 기다림 속에서 나는 새로운 춤을 배운다. 인내의 춤, 믿음의 춤이다. 무대 위에선 음악이 시작되면 몸이 먼저 움직였지만, 무대 아래에서는 사람들의 마음이 먼저 움직이길 기다린다. 리허설실의 공기 속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이들의 땀방울이 또 하나의 안무처럼 느껴진다. 그들의 눈빛 속에는 과거의 나, 그리고 미래의 예술이 함께 숨 쉬고 있다.
자연의 호흡으로 자연의 흐름과 템포를 표현하는 것, 자연을 보고 받은 영감들의 결정체가 클래식 예술인 듯하다. 예술은 자연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고리로 시작했다. 발레 속에서 걸어온 세월은, 인연이란 결국 우리가 사는 지금의 모든 것을 포함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줬다. 무대 위의 움직임 하나, 조명 한 줄기, 음악의 한 음까지도 모두 자연의 숨결 속에서 이어져 있음을 느낀다. 예술이란 결국 신이 사람의 몸을 빌려 표현하는 자연의 또 다른 언어일지도 모른다.
내 인생의 거의 전부를 무대 위에서 보냈다면, 이제는 무대 아래에서 무대를 만드는 사람들과 함께 그 시간을 나눈다. 어쩌면 이제는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나의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후배 무용가들이 자신만의 언어로 예술을 표현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때로 무대에 서는 것보다 더 큰 떨림을 준다. 나의 경험이 그들의 춤에 스며들고, 그들의 성장이 나에게 엄청난 에너지로 되돌아온다. 예술이란 결국 서로의 삶을 나누며 소통하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매일 배워간다.
인연은 사람과의 관계를 넘어 자연의 순환과 닮았다. 하늘과 바다, 산과 들이 서로 기대어 계절을 만들어가듯, 예술 또한 그 속에서 자란다. 무대에서 시작된 춤은 사람에게 닿고, 사람의 마음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삶은 예술이 되고, 예술은 다시 삶으로 순환한다. 내가 걸어온 발자국이 그러했듯, 그 길 위에는 언제나 누군가의 흔적이 함께 새겨져 있다.
겨울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봄이 오듯, 인연도 늘 다음 계절을 예고한다. 스쳐 간 이들, 함께한 시간, 그리고 다시 만날 우연이 모두 또 다른 무대의 시작이 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인연을 믿는다. 무대 아래에서의 나의 무대는 계속된다. 삶과 예술, 그리고 사람을 잇는 보이지 않는 실이 이어지는 한 나의 춤은, 그리고 우리의 춤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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