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탁사에 소유권 넘기고도
임차인 속인채 전세계약
서울 177건…피해액 156억
계약전 신탁원부 확인해야
지난해 말 서울 한 신축 오피스텔에 전세로 들어간 이 모씨(32)는 올해 초 한 신탁회사에서 내용증명을 받았다. 한 달 안에 집을 비우지 않으면 부동산 인도명령과 명도소송을 내겠다는 내용이었다. 알고 보니 이씨뿐만 아니라 해당 오피스텔에 입주한 다른 세입자도 같은 내용증명을 받았다.
전세사기특별법이 시행된 지 2년이 다가오지만 아직도 여러 유형의 전세사기가 끊이지 않고 있다. 그 중 단기임대 못지않게 악질적인 형태로 평가받는 게 바로 '신탁 전세사기'다.
빌라나 오피스텔을 신축하면서 자금이 모자란 건물주는 은행 대출을 위해 부동산을 신탁회사에 넘긴다. 이것을 담보로 수익권증서를 받아 은행에서 대출을 받는 것이다. 이때 임대인은 신탁사의 동의를 얻어야만 전세 계약을 체결할 수 있는데 이를 속인 채 세입자와 계약을 한 뒤 그 보증금으로 은행 빚을 탕감하는 사례가 끊이지 않고 있다. 명백한 사기다.
임대인이 대출금을 다 갚지 못한 경우 금융사는 부동산을 매각해서라도 대출금을 회수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신탁사는 부동산 소유권을 들이대며 세입자에게 퇴거를 명령할 수 있다. 전세 계약 과정에서 신탁사의 동의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임차인은 주택임대차보호법으로 보호받을 수 없다.
12일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전세사기특별법이 적용된 2023년 6월부터 올해 4월 말까지 전체 전세사기 인정 건수 2만9540건 가운데 신탁 전세사기는 총 1203건에 달한다. 지난해 하반기까지 서울로 범위를 좁히면 177건에 피해액은 156억원을 넘는다.
피해자 이씨는 "부동산(공인중개사)에서도 신탁과 관련해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았고 문제가 없는 집이라고 해 전세 계약을 맺었는데 당장 집에서 쫓겨나게 돼 막막하다"고 전했다. 이씨 사례는 임대인이 공인중개사와도 짜고 벌인 사기에 해당한다.
세입자 입장에서 피해를 막으려면 등기부등본과 함께 신탁원부를 확인하는 길뿐이다. 대법원 인터넷등기소를 통하면 된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계약 전 등기부등본의 '갑구'에 부동산에 신탁등기가 돼 있다면 신탁원부를 발급받아 전세 계약 체결에 수탁자(신탁사) 동의가 필요한지 확인해야 한다"며 "이 경우 계약 체결 때 임대인에게 동의서를 보여달라고 꼭 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계약 이후라도 신탁회사에서 동의서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
신종 전세사기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다음달 1일부터 새로 맺는 전세 계약의 경우 더 이상 전세사기특별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 최근 전세사기특별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법 유효기간이 올해 5월 31일에서 2027년 5월 31일로 2년 연장됐지만 올해 6월 1일부터 최초 계약하는 사례는 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됐기 때문이다.
전세사기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 측은 "사기는 끊임없이 벌어지는데 정부가 유효기간은 2년 연장하면서 신규 발생 피해 사례는 더 이상 접수하지 않는 셈"이라며 "애초 전세사기특별법을 제정할 당시 6개월마다 보완 입법을 하겠다고 해놓고 정부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항"이라고 비판했다.
[서진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