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표를 가슴에 품고 사는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따뜻한 동남아에서 살기를 꿈꾼다. 하지만 그 꿈을 당장 실행하는 사람은 드물다. ‘표준의 삶’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으니까.
이숙명 작가의 신작 에세이 ‘발리에서 생긴 일’(김영사)은 그 바람을 행동에 옮긴 한 40대 여성의 이야기다. 어떡하다 보니 발리에서 배로 40~50분 거리의 시골 섬 누사프니다에서 집까지 짓고 살게 된 작가의 ‘발리 생활 언박싱’이다.
그저 선물인 줄 알고 덥석 받아든 발리라는 상자를 열고 파헤쳐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하고 깨달은 것들을 아낌없이 풀어냈다.
훌쩍 떠난 계기는 어쩌면 단순했다. 2016년 30대 후반, 세 들어 사는 서촌 한옥의 문틈으로 외풍과 냉기가 스밀 때마다 ‘따뜻한 곳으로 떠나 단출하게 살고 싶다’는 소망을 눈덩이처럼 키웠다. 그러다 ‘올겨울 집필 여행 겸 일단 떠나자’는 마음으로 장기 투숙할 호텔을 예약했는데 그곳이 바로 인도네시아 발리였다. 그렇게 5개월을 살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이내 다시 떠났다.
발리라고 해서 동남아 풀빌라의 여유로운 삶만 상상하면 안 된다. 운 좋게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서 누사프니다 섬을 제2의 고향으로 삼고 정착했지만, 매 순간이 천국 같지만은 않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듯, 누군가에겐 그저 ‘한 달 살이’로 끝내야하는 일상일 수 있다.
일 년 내내 여름이 계속되는 곳, 전기와 수도가 하루에 한 번씩 끊기는 곳, 호기심 많고 친구 사귀기를 좋아하는 인도네시아 현지인 틈바구니에서 영원한 이방인으로 살아야 하는 곳에서 저자는 삶을 사는 방법을 새로 배웠다.
물자와 자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최소한의 물건으로 일상을 꾸리고, 정전과 단수로 생긴 멈춤의 시간에 느긋함과 여유를 찾는 법을 터득했다. 인터넷으로 사진 한 장 보내는 데만 몇 시간이 걸리는 환경에서 비로소 일과 휴식의 균형을 찾았다. 현지 이웃의 이유 없는 선의를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호기심 어린 시선에 친절로 답하는 법을 익혔다.
저자는 모두에게 발리가 천국이 될 거라 말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의 삶이 버겁다면, 앞으로 살아갈 앞날이 깜깜하고 답답하게만 느껴진다면 편히 숨 쉴 곳이 이 땅 밖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나가보지 않고서는 결코 모를 일이라고, 그 가능성을 속단하지는 말자고 말한다. 그러다 보면 지구 어딘가에 있는 나만의 천국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결국 ‘발리에서 생긴 일’은 어느 날 과감히 표준의 삶에서 벗어나, 내 손에 쥔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미래의 불안을 딛고, 자신의 낙원을 찾은 한 여성의 이야기이자 그가 진짜 발리에서 지난 8년간 살면서 온몸으로 켞은 ‘발리에서 생긴 일’에 대한 기록이다.
영화 및 패션 잡지 기자 출신인 저자는 앞서 ‘어쨌거나 뉴욕’ ‘패션으로 영화읽기’ ‘혼자서 완전하게’ 등 동시대 여성 독자들의 공감을 살 다수의 에세이를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