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신용카드 사용 내역을 확인하다가 거의 1년이 다 되도록 구독 서비스 요금을 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보고 싶은 게 있어서 가입한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언제부터인가 이용하지 않았는데 해지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쓰린 가슴을 안고 서비스를 해지하려는데, 앱 로그인 정보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로그인했지만, 이번에는 어디로 가야 해지할 수 있는지를 찾기가 쉽지 않다. 겨우 구독 해지 버튼을 찾아서 필요한 정보를 넣었더니, 왜 해지하는지, 정말 해지하는지 등을 묻는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서비스를 해지했다.
소비 패턴이 변화하면서 디지털 계약이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다. 기존 소비자 계약을 디지털 공간으로 옮겨놓은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소비자의 라이프 스타일 변화와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소비자 계약과 차이가 있다. 통상 소비자법은 소비자가 합리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정확하고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둔다. 특히 장기 계약은 소비자가 숙고하지 못하고 계약을 체결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고려해 언제든지 계약을 해지할 수 있도록 하고, 과도한 위약금을 부과할 수 없게 하는 방식으로 소비자를 보호한다. 그런데 이런 식의 규제가 디지털 계약에서 소비자를 보호하기에 충분할까.
디지털 환경에서는 더욱 손쉽게 계약을 체결할 수 있다. 사업자는 친절하게 무료나 할인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부담 없이 이용해 보라고 한다. 카드를 등록하고 자동결제를 해야 하지만, 원한다면 언제든지 위약금도 물지 않고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고 하면서 말이다. 정말 소비자는 자유롭게 선택할 자유가 있는가.
최근 여러 조사를 보면 소비자가 자신이 가입한 디지털 서비스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피로를 느끼고 있고, 이용하지 않는 서비스의 자동 갱신으로 경제적 손해를 보는 사례도 상당하다.
유럽연합(EU)은 여러 법규에 흩어진 소비자 보호 규정만으로는 디지털 환경에서의 소비자 보호에 미흡한 면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디지털 공정화법(Digital Fairness Act)’ 제정을 논의하고 있다. 다크패턴(소비자의 착각과 부주의를 유발해 불필요한 지출을 유도하는 행위 또는 디자인) 금지, 중독성 있는 디자인 규제, 구독 해지 절차 간소화, 마케팅의 투명성 강화 등이 주된 목표다.
이제 우리도 디지털 계약에서 소비자 선택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수단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언제든지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는 선언보다는 구체적인 해지 방법이 중요하다. 예컨대 앱상에서 계약 체결은 손쉽게 할 수 있는데, 취소하려면 여러 단계를 거치도록 하거나 취소 버튼을 찾기 어렵게 디자인하는 것은 규제해야 한다.
나아가 소비자가 관성에 따라 또는 서비스 이용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계약 관계를 지속하는 면이 있고, 사업자들이 바로 이런 점을 이용해 장기 계약을 유도하는 식으로 구독 모델 비즈니스를 확대하고 있다면, 더 적극적인 보호 장치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사업자에게 장기간 이용이 없는 소비자의 계약 계속 여부를 확인하도록 하거나, 일정 기간 서비스가 없으면 계약이 자동으로 해지되도록 하는 방안까지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디지털 경제가 급변하는 점을 고려하면 섣부른 강력 규제는 지양해야 한다. 다만 새로운 계약을 이해하고 소비자에게 진정으로 이익이 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 늦춰져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