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물품 보관함의 새로운 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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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에세이] 물품 보관함의 새로운 쓸모

요즘 서울을 걷다 보면 여행의 풍경이 예전과는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무리 지어 다니기보다 자신만의 여행을 즐기는 외국인 여행자가 부쩍 많아졌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에 따르면 외래 관광객 중 단체가 아니라 개별 여행 비중은 2015년 67%에서 지난해 80%를 넘어섰다. 스마트폰 하나면 어디든 길이 되고, 취향이 곧 여정이 되는 시대.

최근 방한 외국인이 역대 최고치를 기록한 가운데 세계 최대 여행 플랫폼 트립어드바이저가 서울을 혼자 여행하기 가장 좋은 도시로 선정한 것은 그래서 더 뜻깊다. 트립어드바이저가 꼽은 서울의 다채로운 매력 중 단연 돋보이는 것은 지하철이다. 첨단 기술로 완성된 최고의 안전성, 외국인에게도 장벽 없는 편리한 서비스는 여행자의 발길을 이끈다. 서울을 찾은 여행자가 가장 즐겨 이용하는 교통수단이 지하철이라는 사실은 이를 방증한다.

뚜벅이 여행자에게 최대 고민거리는 짐이다. 짐의 크기와 무게만큼 고민도 커진다. 지하철을 타고 숙소나 공항까지 짐을 짊어지고 다니다 보면 여행의 설렘은 금세 피로로 기울기 마련이다. 여행자의 발걸음이 잠시라도 가벼워지길 바라는 마음은 캐리어 당일 배송 서비스로 실현됐다. 홍대입구역 등 일곱 곳에서 운영 중인 유인보관소와 함께 짐꾼을 자처한 것은 지하철역 물품 보관함. 269개 역에 마련된 332개 물품 보관함은 월평균 이용 건수가 약 10만 건에 이르는 일상 속 작은 오아시스다.

그러나 이곳은 한때 보이스피싱에 악용될 수 있다는 불신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누군가 그 앞에서 머뭇거리기라도 하면 곧장 의심의 눈초리가 쏟아졌다. 물품 보관함에 맡긴 캐리어가 사람보다 먼저 공항에 도착하고, 공항에서 시내 물품 보관함으로 짐을 보낸 후 빈손 관광이 가능해지면서 그림자가 있던 자리에 조금씩 빛이 들기 시작했다.

짐을 맡긴다는 건 단순히 물리적 부담을 덜어내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짐과 함께 마음의 무게도 내려놓기에 그렇다. 낯선 도시에서 여행 가방을 믿고 맡길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여행자는 한층 가벼워졌다. 편리한 경험은 빠르게 퍼져나가 지난해에는 전년보다 세 배 이상 많은 여행자가 홀가분하게 도시를 거닐었다. 물품 보관함의 새로운 쓸모가 서울 여행의 풍경을 바꿔놓은 셈이다.

벽면을 따라 늘어선 네모난 칸, 이곳엔 여행자의 짐만큼이나 다양한 이야기가 머물다 간다. 무료로 의약품을 나누는 다정한 응급실일 때도 있었고, 한 연인에게는 잊지 못할 프러포즈의 무대였다. 몇 해 전엔 ‘달콤 창고’라는 이름으로 간식과 응원 메시지를 통해 지친 청년들을 위로하기도 했다. 짐이 드나들 때마다 이야기가 쌓여갔다. 다음달이면 본격적인 여름 휴가철이 시작된다. 이야기 서랍장, 물품 보관함이 다시 한번 존재감을 한껏 발휘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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