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민간 인공지능(AI) 전문가 시절 참석한 회의에서 “우리에게 GPU(그래픽처리장치)가 충분히 있다면 세계 최고 수준의 AI 모델도 만들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한국은 기술력이 있음에도 GPU가 없어 너도나도 AI 개발에 애를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GPU를 잘 구해 오는 것도 연구자의 능력 중 하나라는 평이 나올 정도였다. 당시 필자가 주도해 H100 GPU 500여 장으로 개발한 모델이 2025년 미국 스탠퍼드대 인간중심AI연구소가 선정한 ‘주목할 만한 AI 모델’로 뽑힐 만큼 부족한 인프라 투자를 기술력으로 메웠다.
그런 맥락에서 지난주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와의 만남은 우리나라 AI 발전의 한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이 자리에서 엔비디아는 한국에 최신 GPU를 26만 개 이상 공급하기로 약속했다. 불과 작년 하반기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GPU 확보 목표가 ‘2030년까지 3만 개’ 수준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실로 놀랍다. AI산업계의 오랜 목마름을 해결할 가뭄의 단비 같은 성과다.
나아가 엔비디아는 한국을 ‘피지컬 AI’ 혁명의 핵심 파트너로 여긴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피지컬 AI는 물리적 세상에 AI가 융합한 것을 말하는데, 제조업과 AI 역량을 모두 갖춘 한국은 세계 최고의 피지컬 AI를 선도할 국가라는 것이 젠슨 황의 평가다. 이는 으레 하는 상찬이 아니다. 엔비디아는 삼성, SK, 네이버 등의 피지컬 AI 및 제조 AI 진흥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현대자동차와는 30억달러 규모의 공동 투자를 단행하기로 했다.
엔비디아와 우리나라의 인연은 1990년대부터 이어 왔다. 젠슨 황 CEO는 이번 방한에서 1996년 고(故) 이건희 회장에게 받은 편지를 공개하고, 대통령 앞에서 “엔비디아는 지난 30년간 한국의 젊은 세대와 함께 성장해 온 최고의 친구”라며 한국과의 오랜 인연을 강조했다. 이는 엔비디아가 아직 스타트업이던 시절 용산전자상가에서 온라인 게임 그래픽카드를 영업하며 성장한 서사를 떠올리게 한 발언이었다. 장안의 화제가 된 ‘치맥 회동’도 한국 기업들과 엔비디아의 ‘깐부’ 관계, 즉 깊은 우정과 파트너십을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엔비디아가 스타트업에서 ‘AI 칩 최강자’로 등극한 것처럼 AI계의 신흥 도전자인 한국은 이제 글로벌 AI 발전의 중심에 서 있다. 지난 9월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은 AI와 재생에너지 인프라 투자를 약속했고 자회사인 뷔나그룹을 통해 20조원 규모의 투자의향서를 전달했다.
또한 지난 10월 오픈AI는 스타게이트 프로젝트를 위해 한국 기업과 대규모 반도체 공급계약을 맺었다. 국내 초대형 AI 데이터센터 구축을 위한 협력이다. 이런 흐름이 APEC 주간에 엔비디아의 GPU 26만 개 공급으로 이어져 한국은 AI 자본·기술·인프라를 연결하는 거점으로 올라섰다.
AI 혁명을 위한 퍼즐이 점차 맞춰지고 있다. 마지막까지 채워야 할 것은 바로 사람과 아이디어다. 글로벌 AI 인재와 지혜가 한국에 모여 성장의 꽃을 피울 수 있는 토양을 만드는 것이 앞으로의 숙제다. AI가 연구자들의 훌륭한 동료가 되도록 정책 환경을 조성하고 과학기술 발전을 가속화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제는 AI 혁명을 위해 온 국가의 역량 결집이 절실한 시점이다. 정부는 민관을 하나로 이끌고, 글로벌 AI 3대 강국 실현을 위해 총력을 기울일 것이다. 경주 APEC 정상회의는 그 출발점이자 대한민국 AI의 새로운 분기점이 될 것이다.

1 day ago
5
![[인사]LX홀딩스](https://img.etnews.com/2017/img/facebookblank.png)
![[한경에세이] 생각보다 가깝고 오래된 친구](https://static.hankyung.com/img/logo/logo-news-sns.png?v=20201130)









English (U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