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악기란 현대적으로 개량되지 않은, 그시대에 사용한 악기와 부품을 그대로 사용하는 악기를 말한다. 조르디 사발(Jordi Savalle)은 현존하는 가장 독보적인 시대악기 음악가다. 바르셀로나 음악원에서 첼로를 전공한 그는 비올라 다 감바(15세기 후반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처음 출현한 7현 악기)를 독학한 후, 현재까지 시대악기로 고전주의·바로크·르네상스·중세 음악 등을 선보이고 있다.
약 1,000년의 세월을 넘나드는 그의 음악은 마치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백색 마법사 간달프처럼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갖고 있다. 1989년에 시대악기 연주자로 구성된 '르 콩세르 드 나시옹(Le Concert Des Nations, 이하 LCDN)’을 조직한 그는 현재까지도 자신의 제자들과 우수한 시대악기 연주자들을 양성하면서 LCDN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으며, 통찰력 있고, 기품있는 지휘자로 명성을 쌓았다.
지난 10월 1일 파리 북쪽 라빌레 공원에 위치한 ‘필하모니 드 파리(Philharmonie de Paris)’에서 조르디 사발은 자신이 이끄는 LCDN과 함께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 <Schubert - Symphony No.8 in B minor, "Unfinished" D759>과 로버트 슈만의 교향곡 G단조 츠비카우 WoO29 그리고, 브루크너 교향곡 0번 <Anton Bruckner - Symphony No. 0 in D minor, "Die Nullte" WAB 100>을 시대악기 연주로 들려줬다.
우선, 전체적인 레퍼토리를 '미완성'이라는 콘셉트로 구성한 점, 여기에 낭만주의 시대에 살았던 작곡가들의 음악을 바로크 시대의 혹은 그 이전 시대의 악기들로 연주한다는 것이 창의적인 기획으로 다가왔다.
未완성을 아름답게 완성시킨 연주
최근 다리를 다친 후 건강이 악화된 조르디 사발이 언제 그랬냐는 듯 목발을 짚으며 성큼성큼 포디움을 향해 걸어 나왔다. 짙은 주름과 선한 인상 그리고 관객을 향해 격조 있게 인사하는 모습 모두가 음악적이었다. 마치 모든 음악을 득도한 신선이 지휘봉을 잡은 느낌이었다.
이날 연주는 악기 배치도 눈에 띄었다. 제1 바이올린과 제2 바이올린이 같은 방향에 있고, 현악기가 전진, 관현악기가 후방에 배치된 기존 오케스트라와는 달리 오케스트라 양 끝을 바이올린으로 감싸고 콘트라베이스를 목관악기 뒤에 배치해 창의적으로 소리 층위를 구성했다. 경험이 오래 축적된 노련한 지휘자만이 할 수 있는 시도라고 생각했다. 조르디 사발은 시대악기가 낭만주의의 인상을 구현할 때 가장 효과적인 소리가 어떤 것인지 세심한 연구와 검증을 한 듯했다.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이 시작되었다. 바이올린과 클라리넷 사이에 긴장과 묵직함이 가득했던 1악장 초반 부분은 들판에 만연한 꽃밭처럼 포근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들려줬다. 곡의 원형과도 같은 긴장감과 드라마틱한 전개도 놓치지 않았다. 조르디 사발은 2악장에 이르러 미완성 교향곡을 좀 더 성스러운 경지로 소리를 끌어냈다. 잔잔하면서도 잔향이 오래 남는 묵상 같은 2악장이었다.
<로버트 슈만의 교향곡 츠비카우>에서 조르디 사발은 시대악기가 들려줄 수 있는 잠재력을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바로크적인 엄격함이 낭만주의적 상상력에 수혈되면서, 더욱 유연한 소리 풍경을 펼쳐냈다. 이 곡은 1830년대 초에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원작으로 슈만이 오페라를 스케치하다가 극적인 요소와 교향적 요소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여 2악장의 미완성 교향곡으로 남겨졌다. ‘츠비카우’는 로버트 슈만의 고향인데, 이 곡은 향수병보다는 자신의 음악적 고향에 대한 탐구와 방향성 찾기에 더 가깝게 느껴졌다. 드물게 연주되는 레퍼토리라 집중하여 감상하였다. 비극적 테마와 함께 펼쳐진 음악적 드라마가 시대악기와 더불어 좀 더 신화적 스토리텔링으로 다가왔다.
이날 연주의 최고봉은 단연 <브루크너 교향곡 0번>이었다. 클래식 음악 역사상 0번이라는 번호를 단 세 작품 중 하나인 이 교향곡은 겹겹이 쌓아가는 관현악 파트로 음악적 질료를 한없이 불태우는 것이 매력이다. 작곡할 때 브루크너는 베토벤 교향곡 9번에 깊숙이 빠져,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브루크너는 이 교향곡을 작곡할 당시 빈 음악계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보이고 싶은 욕구가 컸다. 그래서 이 교향곡은 브루크너의 다른 교향곡에 비해 어딘가 설익고 과장이 심한 느낌인데, 이게 자꾸 듣다 보면 묘한 매력으로 사람을 이끈다.
조르디 사발과 LCDN은 ‘미숙한’ 매력을 지닌 <브루크너 교향곡 0번>의 잠재력을 시대악기로 극대화시키면서 장엄하고 웅대한 대서사시로 재창조해냈다. 오르간 연주자였던 브루크너가 교향곡 이전에 작곡했던 종교음악의 분위기는 더욱 증폭되었다. 지휘자 조르디 사발은 낭만주의적 소재를 가지고 중세와 르네상스 경계 어딘가에서 시대악기로 LCDN 연주자들과 함께 자유롭게 노니는 것 같았다. 브루크너 교향곡에 종종 등장하는 코다와 오스티나토 부분도 아주 매끄럽고 노련하게 연주했다.
<슈베르트 미완성 교향곡>을 제외하고 사실, 쉽게 접하기 힘든 레퍼토리여서 관련 레퍼런스를 다 찾아보고, 수십번 다시 듣기를 하면서 이 공연의 예매를 서둘렀다. 모든 곡들이 ‘미완성’이 기본 테마라서 관련 곡들을 감상할 때면, 마음 한편 어딘가에 슈베르트와 슈만 교향곡 2악장 뒤에 무언가 더 있지 않을까? 브루크너 교향곡 0번은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처럼 노래가 있지 않을까? 라는 억지 상상으로 빈 곳을 완성하려 했다. 조르디 사발과 LCDN이 연주한 ‘미완성’ 레퍼토리는 단명하고, 정갈해 이런 결핍을 느낄 틈조차 없었다. 미완성이 아름다운 완성으로 재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파리가 부러운 이유는 이런 연주들이 매일 이 필하모니 드 파리와 같이 멋진 공연장에서 펼쳐진다는 것이고, 관객들은 부담스럽지 않은 입장료로 일상처럼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비록 필하모니 드 파리가 건축부터 완공까지 건축주와 건축가 장 누벨 사이에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공연장이었지만, (미완성 그 자체인 건축물이지만) 마치 조르디 사발의 연주가 나머지 빈 곳을 아름다운 연주로 채워준 느낌이었다.
[조르디 사발과 르 콩세르 드 나시옹]
파리=이진섭 칼럼니스트•아르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