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과 소설[내가 만난 명문장/이지수]

1 week ago 14

이지수 일본어 번역가·‘아무튼, 하루키’ 저자 “25m 레인을 헤엄치는 것과 소설을 한 줄 쓰는 건 비슷한 일이라고 안은 생각한다.”-스즈키 유이 ‘휴대 유산’ 아직 (한국어로는) 세상에 나오지 않은 문장이다. 내가 번역 중인 책 속 문장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안은 소설가다. 셰익스피어의 여동생 조앤을 주인공으로 한 단편을 쓰고 있다. 안의 소설에서 셰익스피어는 조앤의 글재주를 시기한다. 대본을 썼다는 조앤의 말에 셰익스피어는 신음하듯 내뱉는다. “왓 더 디킨스!” 어리둥절해진다. 디킨스는 셰익스피어보다 한참 뒤에 태어났으니까. 검색 끝에 그것이 셰익스피어의 희곡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 속 대사임을 알게 됐다. 이때의 디킨스는 소설가 찰스 디킨스와 무관하며, “왓 더 디킨스!”는 “What the devil”(이게 대체 무슨)의 완곡어법이라는 사실을. 이 내용을 역주 한 줄에 담아내느라 끙끙대는 사이 시간은 흐르고, 학원을 갔던 아이가 돌아와 배고프다고 칭얼댄다. 간식을 챙겨 주고 돌아오니 안은 1000m를 헤엄치고 있다. 안은 단편을 쓰는 동안 쇼트브레드와 커피 외에는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으나 수영장만큼은 빼먹지 않고 간다. 25m 레인을 수십 번 오가며 안은 문장을 여러 줄 떠올렸을 것이다. 때로는 소설 속 인물에게 ‘도킹’하지 못해 괴로워하고, 글의 리듬을 찾지 못해 헤매지만 안이 자신이 만든 세계를 포기하지 않는 한 조앤의 이야기는 틀림없이 완성된다.‘휴대 유산’은 한글 파일 한 장마다 역주를 네다섯 개씩 달아야 하는 까다로운 소설이다. 검색해야 할 단어들 앞에서 눈앞이 캄캄해지고, 때로는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 괴로워진다. 그러나 내가 포기하지 않는 한 안의 이야기는 틀림없이 완성된다. 25m 레인을 헤엄치는 것과 번역을 한 줄 하는 것도 비슷한 일이지 않을까. 내가 만난 명문장 > 구독 이런 구독물도 추천합니다! 베스트 닥터의 베스트 건강법 횡설수설 A Farm Show-창농·귀농 고향사랑 박람회 이지수 일본어 번역가·‘아무튼, 하루키’ 저자©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좋아요 0개 슬퍼요 0개 화나요 0개 지금 뜨는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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