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질서 주무르는 트럼프 제국의 설계자…'록브리지 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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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의 디커플링은 없습니다. 조만간 관세 합의안이 나올 겁니다.”

지난 4월 13일 미국 플로리다주 키비스케인리츠칼튼호텔. 세간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기부자 모임 ‘록브리지 네트워크’의 비공개 콘퍼런스에서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이 연사로 나와 “미·중 갈등이 완화될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중국산 제품에 145% 추가 관세를 부과하며 관세 전쟁 수위를 최고조로 끌어올리던 시기다. 하지만 정확히 한 달 뒤 미·중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협상을 거쳐 상대국에 매긴 관세를 115%포인트씩 낮추기로 합의했다. 미·중의 ‘강 대 강’ 대결을 우려하던 시장의 예상을 뒤집는 조치였다. 이날 록브리지 모임 참석자들이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전환을 한발 앞서 감지한 것이다. 록브리지는 ‘트럼프 제국의 설계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과 새로운 관계 설정에 나서야 할 이재명 정부도 록브리지에 주목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록브리지, 그 중심엔 밴스 부통령

세계 질서 주무르는 트럼프 제국의 설계자…'록브리지 네트워크'

한·미 정계와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베선트 장관을 통해 미·중 관계의 향방을 흘린 록브리지는 현재 미 권력의 중심으로 꼽힌다. 이날부터 사흘간 열린 록브리지 콘퍼런스에는 베선트 장관을 비롯해 스티브 위트코프 중동특사, 털시 개버드 국가정보국장,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 보건복지부 장관 등 트럼프 행정부 실세가 대거 출동했다. 시암 산카르 팰런티어 부회장과 오미드 말릭 1789캐피털 대표 등 재계와 자본시장 거물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트럼프 대통령 재집권 이후 열린 첫 모임이라 열기가 더 뜨거웠다는 후문이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한 인사는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거물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었다”며 “민간 기부자 그룹의 행사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고 전했다.

록브리지는 JD 밴스 미국 부통령과 보수 성향 칼럼니스트 크리스토퍼 버스커크가 2019년 공동 창립한 정치 후원 단체다. 밴스가 오하이오주 록브리지의 한 리조트에서 첫 회의를 조직해 지금의 이름을 얻었다. 피터 틸 페이팔 창업자 등 미국 테크업계 거물들이 거액을 후원해 뒤를 받치고 있다.

록브리지는 활력을 잃은 기존 공화당을 대체하는 신보수의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겠다는 목표로 창립됐다. 2만5000달러를 내면 모임에 참여할 수 있고 종신 회원비는 100만달러(약 14억원)다. 정치인 후원, 여론 형성, 유권자 조직 등 다양한 정치 활동에 연간 7500만달러가량의 예산을 운용한다.

세계 질서 주무르는 트럼프 제국의 설계자…'록브리지 네트워크'

록브리지가 이름을 알린 것은 지난해 미 대선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작년 4월 트럼프 캠프는 선거 자금이 고갈돼 공화당 경선에서 코너에 몰렸다. 코크네트워크 등 공화당의 전통적 돈줄은 트럼프 대신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주지사와 니키 헤일리 전 유엔대사를 지원했기 때문이다.

이때 돈다발을 들고 등장한 것이 록브리지다. 이들은 트럼프에게 거액의 선거 자금을 투척하고 밴스를 부통령 후보로 추천했다. 록브리지 회원인 도널드 트럼프 주니어가 록브리지와 아버지 트럼프를 연결했다. 기존 미국의 정치 문법을 해체하는 정치인 트럼프와 테크 거물을 주축으로 한 새로운 기부자 그룹이 2024년 미국 대선을 통해 본격적으로 결합한 것이다. 사안을 잘 아는 한 전직 고위 관료는 “미국 정치·경제 권력 구조의 전면적 재구조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평가했다.

페이팔 마피아와 트럼프의 결합

록브리지 회원들은 면면이 화려하다. 우선 트럼프 대통령의 장남이 록브리지 활동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틸은 밴스 부통령의 오랜 후원자이자 정신적 멘토이면서 록브리지의 ‘배후 조종자’로 알려져 있다. 정부효율부(DOGE) 수장을 맡아 트럼프 2기 내각의 초기 개혁을 이끈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도 이 그룹의 멤버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100만달러어치 비트코인을 기부한 타일러·캐머런 윙클보스 형제, 투자업계 거물인 레베카 머서도 빼놓을 수 없다. 수지 와일스 백악관 비서실장과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을 비롯해 베선트, 케네디 주니어, 개버드 등 트럼프 행정부 주요 인사도 록브리지의 일원이다.

이 밖에 록브리지 기부자 중에는 실리콘밸리와 텍사스, 플로리다 등에서 활약하는 젊은 기업가가 다수 포진해 있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 후에는 돈뭉치를 들고 록브리지 문을 두드리는 부호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정치적 올바름을 내세우는 민주당의 ‘PC주의’에 신물이 난 테크업계 거물들은 록브리지를 통해 미국과 세계 질서를 자신들의 가치, 철학에 맞게 재편하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고 있다. 특히 밴스 부통령의 정치적 성공은 록브리지의 영향력을 더 강화할 전망이다. 미국 하버드대 법학박사 출신 보수 성향 경제학자 오렌 캐스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록브리지가 공화당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미국 넘어 해외에도 관심

록브리지에 정통한 복수 관계자에 따르면 록브리지는 트럼프 행정부의 성공을 디딤돌 삼아 정치적 영향력을 더 확대해 나갈 방침이다. 공화당을 록브리지 중심으로 재편하려는 야심도 있다. 이뿐 아니라 전 세계로 영향력을 넓히려는 움직임도 감지된다. 록브리지 일원인 트럼프 주니어가 특별한 직책 없이 세계를 돌며 정·재계 주요 인사와 접촉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관측이 나온다. 록브리지의 첫 해외 타깃은 한국 일본 동남아시아 등 미국의 우방이 결집한 아시아가 될 공산이 크다.

록브리지는 창립자 밴스 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의 권력을 이어받아 미국 우선주의를 핵심으로 한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구상을 완성하겠다는 계획도 마련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은 ‘트럼피즘’ 존속 기간을 4년이 아니라 최소 20년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미국 정가에서 “모든 길은 록브리지로 통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록브리지가 실제로 미국 로비스트의 최우선 타깃이 된 지 오래다.

트럼프·머스크 충돌 여파는

최근 트럼프 대통령과 머스크 CEO가 충돌한 것을 두고 록브리지의 균열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머스크 CEO가 DOGE를 떠나면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불만을 토로했고, 트럼프가 “실망스럽다”고 맞불을 놓으며 둘의 관계가 파열음을 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익명을 요구한 록브리지 관계자는 “개성이 강한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며 “록브리지의 결속력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다만 “그럼에도 문제가 지속된다면 이는 일론 머스크에게 재앙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국도 록브리지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미국과 관계를 새롭게 구축할 때 주요 변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외 관계에 관해 정무적 판단을 할 때 트럼프 주니어와 위트코프 특사 등 록브리지 멤버의 의견을 적극 참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외교 전문가는 “록브리지가 사실상 미국의 주요 정책과 의사결정을 주무르고 있다”며 “트럼프 행정부의 독특한 특성을 감안할 때 록브리지에 대한 전략적 접근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지훈 기자 liz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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