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어쩌면 해피엔딩’ 공연 장면. 올리버(윤은오)와 클레어(박진주)가 차를 타고 제주도를 향한 여행을 시작하고 있다. 사진제공 | CJ ENM
폐기처분만 남은 로봇 둘의 사랑 이야기가 뮤지컬의 본고장, 미국 브로드웨이의 가슴을 울렸다. 한국 창작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Maybe Happy Ending)’이 제78회 토니상에서 뮤지컬 작품상을 포함한 6개 부문을 석권한 대사건. 비틀즈와 BTS가, 마이클 잭슨의 문워크가 처음으로 세계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처럼, ‘어쩌면 해피엔딩’의 등장은 미국은 물론 세계 공연계에 거대한 충격을 던졌다.
호박마차를 탄 신데렐라 같은 작품, ‘어쩌면 해피엔딩’은 과연 어떤 뮤지컬이기에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을 완벽한 해피엔딩을 쓸 수 있었던 걸까.
이 작품은 2016년 12월 대학로의 작은 소극장에서 시작됐다. 단 세 명의 배우가 무대를 채우는 소박한 구성이었지만 인간보다 더 따뜻한 로봇들의 감정과 스토리, 무엇보다 짙고 오래 가는 여운을 담고 있었다. 박천휴 작가와 윌 애런슨 작곡가가 의기투합해 만든 이 뮤지컬은 기어이 미국시장에 진출해 2024년 브로드웨이 벨라스코 극장에서 정식 개막했고, 지금까지 오픈런으로 공연 중이다. 토니상 6관왕은 이 작품이 치열하게 쌓아올린 9년 빌드업의 정점이었다.
올리버(정욱진)와 클레어(홍지희)는 서로를 통해 사랑의 감정을 깨닫게 된다.
● 사랑을 배우고, 이별을 겪고, 다시 만나고
이야기의 배경은 가까운 미래 서울 메트로폴리탄. 삶의 편의를 위해 가전제품처럼 헬퍼봇을 구매해 사용하는 시대다. 구형모델이 된 헬퍼봇은 폐기처분하지 않고 수명을 마칠 때까지 작은 아파트에서 홀로 지내게 한다. ‘어쩌면 해피엔딩’의 주인공들인 남자 헬퍼봇 올리버는 모델5, 여자 헬버봇 클레어는 6다. 클레어 쪽이 좀 더 신형인 셈이다.
이야기는 클레어가 자신을 충전할 충전기를 빌리기 위해 올리버 집의 문을 두드리면서 시작된다. 모델도, 충전 방식도, 성격도 다른 둘이지만 매일 충전기를 주고받는 일상을 반복하는 동안 조금씩 서로를 알아간다.
올리버는 자신을 두고 떠난 옛 주인(재즈마니아였다) ‘제임스’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클레어는 언젠가는 변하고 마는 인간의 감정을 알기에 조심스럽다. 서로 다른 상처와 믿음을 가진 두 로봇은 함께 제주도로 여행을 떠난다. 올리버는 제임스를 찾기 위해, 클레어는 반딧불이를 보기 위해. 둘의 여행은 관계의 밀도를 바꿔놓는 감정의 여정이기도 했다.
하지만 마주한 현실은 냉혹했고, 둘은 다시 세상의 전부인 방으로 돌아온다. 수명이 다한 클레어는 자신이 짐이 되길 원치 않으니 이제 관계를 정리하자고 올리버에게 말한다. 결국 둘은 그동안 함께한 기억을 지우기로 결심한다. 메모리를 리셋하고 각자의 삶으로 돌아간 두 로봇.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지막 장면에서 클레어가 다시 올리버 집의 문을 두드린다. 올리버는 처음 만남과 달리 친절하게 문을 열어주고, 충전기를 빌려준다. 클레어는 충전을 하며 올리버에게 묻는다.
“괜찮을까요?”
“어쩌면요.”
짧은 대사와 장면이지만 관객의 마음은 시큰해진다. 그리고 궁금해진다. 올리버와 클레어는 정말 기억이 리셋되었을까. 아니면 아주 작은 기억의 조각이라도 남아 있을까. 그것도 아니면, 둘은 아예 기적이 삭제되지 않은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내 관객의 마음은 환해진다. 아무렴 어떤가. 어쩌면, 이게 진짜 해피엔딩일지도.
올리버(신재범)와 클레어(장민제)
● ‘우린 왜 사랑했을까’…무대를 채우는 명넘버들
‘어쩌면 해피엔딩’에는 이야기만큼이나 감성을 자극하는 명넘버들이 가득하다. 올리버의 쓸쓸한 일상을 노래하는 ‘나의 방 안에’, 세상의 전부와 같았던 자신들의 방에 작별을 고하는 ‘굿바이 마이룸(Goodbye, My Room)’, 연인인 척하며 나누는 유쾌한 허세 ‘마이 페이버릿 러브스토리(My Favorite Love Story)’는 각각 사랑의 시작과 끝, 그 사이의 미묘한 설렘과 슬픔을 담고있다. 극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사랑이란, 어쩌면’은 작품의 정서를 극적으로 끌어올리는 넘버로, 한국 관객들 사이에선 ‘눈물 버튼’으로 통한다.
엔딩과 함께 또 하나의 명장면은 제주도의 반딧불이 장면이다. 어두운 숲을 밝히는 반딧불이 속에서 두 로봇이 서로를 향한 설렘을 처음으로 깨닫는 순간. 말없이 눈빛으로 주고받는 감정이 말보다 큰 울림을 전하는데, 이때 부르는 넘버가 ‘반딧불에게’다.
‘어쩌면 해피엔딩’의 성공은 K-뮤지컬의 미래를 새롭게 열어젖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극히 한국적인 배경과 감성, 섬세한 서사가 브로드웨이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결과는 매우 고무적이다.
10월이 되면 ‘어쩌면 해피엔딩’이 국내 10주년 기념 공연으로 돌아온다. 서울 두산아트센터에서 다시 한 번 관객들과 마주할 준비를 하고 있다. 처음 보는 관객이든, 다시 보는 열성 팬이든 이 작품은 여전히 무대에서 묻고 답할 것이다.
“괜찮을까요?”
“어쩌면요.”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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