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살·비장미 가득 뮤지컬 ‘시라노’
사랑에 서툰 영웅, 웃음과 눈물 선사
시대 넘나든 보편적 사랑 메시지
관객을 사로잡는 감동의 서사시
사랑 앞에서 뚝딱이는 모습은 누구나 사랑스럽다. 배우 최재림이 밧줄을 탄 채 허공을 가로지르며 멋지게 등장하지만 그도 사랑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자 관객은 깔깔깔 웃는다. 코가 커서 슬픈 그는 영락없는 영웅이자 익살꾼인 시라노였다.
5년만에 3번째 시즌으로 돌아온 뮤지컬 ‘시라노’에서 최재림과 임준혁 배우가 환상의 ‘남남케미’를 보여준다. 시라노는 완벽한 낭만 전사로 유려한 사랑의 언어를 말하지만 코가 커 못생겼다. 반면 크리스티앙은 잘생겼지만 사랑 앞에서 아무 것도 못하고 얼어붙고 마는 신입 병사다. 록산은 잘생긴 크리스티앙에게 첫눈에 반하고 시라노에게 조언을 구하며 진실한 사랑을 찾는다. 이에 시라노는 크리스티앙의 아름다운 언어가 되어주고 록산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숨긴다.
뮤지컬 ‘시라노’는 프랑스의 시인이자 극작가 에드몽 로스탕이 실존 인물인 시라노 드 베라주라크를 모티브로 쓴 희곡을 각색했다. 스페인과 전쟁 중이던 17세기 프랑스에서 용맹한 가스콘 부대를 이끌었던 영웅 시라노는 자유분방한 철학가이자 뛰어난 풍자 작가이며 당대 최고의 검술사였다.
뮤지컬에는 아름다운 사랑의 언어, 위트 넘치는 대사들이 넘쳐난다. 연애편지 대필이라는 재미있는 설정을 바탕으로 두 남자가 입을 맞춰 2층 발코니에 있는 록산을 향해 부르는 사랑의 노래는 웃기면서도 로맨틱하다.
인터미션 이후 2막에선 비장한 전투신이 이어지면서 분위기가 달라진다. 1막에서 시라노의 익살적이고 문학적인 면모를 보여줬다면, 2막에선 용감한 전사의 모습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저 하늘이 날 버려도 이 육체가 소멸해도 내 영혼만은 영원히 숨쉬리. 바위 같은 걸음으로 빛나는 용기를 품고 혼자라도 한 걸음 한 걸음 가야만 해”라고 시라노는 노래 부른다.
이렇게 복합적이고 다양한 면모를 지닌 시라노를 최재림이 완벽하게 소화하며 관객들을 쥐락펴락한다. 그뿐만 아니라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짜릿한 전율을 선사하고 애절한 감성으로 노래하며 눈물샘을 자극하기도 한다.
여성 캐릭터 록산은 보다 주체적이고 입체적인 인물로 재설계됐다. 사랑하는 남성에게 거침없이 다가가고, 그를 위해서라면 전쟁터 한가운데로 식량을 들고 찾아간다. 결국 세 남녀의 서로 다른 사랑의 모양을 보여주며 인물의 성격과 상황, 시대적 배경 등을 알기 쉽게 풀어낸다.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보편적인 사랑 이야기로 관객들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무대는 찢어진 종이가 겹겹이 쌓여 마치 오래된 책을 보는 듯한 네모 프레임 안에 담긴다. 17세기 프랑스 라그노의 빵집, 가스콘의 훈련장, 록산의 집, 수녀원, 전쟁터를 생생하게 구현했다. 스크린이 내려오고 그 앞에서 배우들이 몇 마디 주고받으면 바로 무대전환된다. 무대는 고풍스러우면서도 미디어 아트를 활용했다.
프랭크 와일드혼이 이번에 새로 작곡한 ‘연극을 시작해’ ‘말을 할 수 있다면’ ‘달에서 떨어진 나’ 3곡의 넘버도 작품에 잘 묻어나며 18인조의 오케스트라가 빚어내는 풍성한 사운드가 몰입도를 한층 끌어올린다. 내년 2월 23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