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심포니 옆집서 울려퍼진 동양철학X서양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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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규 작곡 '동서양 혼합앙상블을 위한 <강강술래>' 공연 장면 / 사진 제공. 스테이지원.

김인규 작곡 '동서양 혼합앙상블을 위한 <강강술래>' 공연 장면 / 사진 제공. 스테이지원.

26일 서울 예술의전당 IBK기업은행챔버홀. 공연 시작 전부터 객석에는 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평소 한 곳에서 보기 어려운 클래식 공연산업 관계자들과 국악계 주요 관계자들이 객석 곳곳을 채웠기 때문이다. 이날 선보이는 작품들이 단순한 창작 초연 이상의 의미를 가진 프로젝트라는 사실을 짐작하게 하는 풍경이었다.

충돌과 스며듦...<강강술래>가 보여준 동서양의 접점

첫 곡은 김인규의 동서양 혼합앙상블을 위한 <강강술래>. 당초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2025년 초연된 작품을 올해 2월 빈 무지크페라인 황금홀에서 플루트 협주곡 버전으로 개작했고, 이를 다시 이번 공연에 맞춰 동서양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재편곡한 곡이다.

3대의 바이올린과 1대의 비올라, 첼로와 더블베이스로 구성된 서양악기군과 피리·대금·아쟁·해금으로 구성된 전통악기군이 하나된 편성으로 공연이 시작됐다.

조이오브스트링스 더블베이시스트 오승희 / 사진 제공. 스테이지원.

조이오브스트링스 더블베이시스트 오승희 / 사진 제공. 스테이지원.

1악장 ‘대화(Conversation)’에서는 후기 르네상스 베네치아 악파의 이중합창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작곡가의 설명처럼, 서양 현악군이 몽환적인 사운드를 펼치자 국악 앙상블이 새로운 전통적 선율로 응답했다. 이후 두 음악 언어는 정면으로 충돌하기보다 서서히 서로의 틈으로 스며들 듯 교차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더블베이스의 역할이다. 조이오브스트링스 더블베이시스트 오승희는 무대를 가득 메우는 배음으로 첼로보다 오히려 아쟁과 해금의 선율을 떠받쳤다. 단순한 저음 보강이 아니라 국악기와 서양 현악기 사이를 연결하는 존재였다.

2악장 ‘비가(Passacaglia)’는 제목부터 인상적이었다. 단순히 애가(哀歌)를 뜻하는 ‘엘리지(Elegy)’가 아니라 ‘파사칼리아(Passacaglia)’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의미심장했다. 반복적으로 이어지는 통주저음 위에 변주가 쌓여가는 바로크 음악 형식을 차용한 듯, 첼로와 더블베이스가 죽음을 암시하듯 네 음의 하강 선율을 지속적으로 반복했고, 그 위로 해금과 바이올린, 비올라의 선율이 층층이 변주되며 비극적 서사를 확장해 나갔다. 단순한 슬픔의 표출이라기보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위를 통과하는 인간의 의지를 음악적으로 구현한 악장에 가까웠다.

중반부 첼로 솔로에서 시작해 아쟁, 바이올린, 피리, 더블베이스, 해금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음향은 압도적이었다. 익숙한 강강술래 선율은 피리를 통해 템포가 비틀린 낯선 형태로 등장하며 민요를 현대음악의 영역으로 끌고 갔다.

<강강술래>를 연주하는 피리 진윤경과 대금 김태환 / 사진 제공. 스테이지원.

<강강술래>를 연주하는 피리 진윤경과 대금 김태환 / 사진 제공. 스테이지원.

3악장 ‘윤무-강강술래’는 이날 공연 초반 가장 강렬한 순간이었다. 피리가 제시한 강강술래 선율 위로 대금과 아쟁, 바이올린이 차례로 얽혀 들었고, 이들이 만들어낸 거친 불협화음을 더블베이스가 정리하며 템포 변화를 이끌었다. 비올라는 국악기와 서양악기 사이를 잇는 연결 고리 역할을 수행했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연주자들의 밝은 에너지였다. 연주자들은 단순히 악보를 재현하는 수준을 넘어 음악의 원초적 생명력을 직접 분출하는 듯했다. 동서양의 만남이라는 개념적 실험 이전에 살아 움직이는 거대한 생명체 같은 음악이었다.

‘칼의 노래’처럼 날카로웠던 김동현의 <무아>

두 번째 작품은 김준호의 '독주 바이올린과 챔버 오케스트라를 위한 <무아>' 정치용의 지휘 아래 제1바이올린 5명, 제2바이올린 4명, 비올라 3명, 첼로 3명, 더블베이스 2명으로 구성된 현악 앙상블에 피리와 대금, 그리고 플루트·오보에·클라리넷·바순·호른이 더해진 24인조 동서양 챔버 오케스트라가 꾸려졌다.

김준호 작곡 '독주 바이올린을 위한 <무아>'를 연주하는 바이올리니스트 김동현 / 사진. 스테이지원 제공.

김준호 작곡 '독주 바이올린을 위한 <무아>'를 연주하는 바이올리니스트 김동현 / 사진. 스테이지원 제공.

독주자로 나선 바이올리니스트 김동현은 첫 음부터 강렬했다. 붉은 조명이 무대를 뒤덮은 가운데 그가 제시한 음은 바이올린군을 통해 메아리처럼 퍼져나갔다. 검술에 통달한 검객이 칼을 뽑을 때 퍼지는 금속성 잔향 같은 음향이었다. 더블베이스와 첼로가 불안한 긴장을 조성하고, 독주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질주하다 어느 순간 첼로와 베이스의 주도로 정돈되는 흐름은 라벨의 <라 발스>를 떠올리게 했다.

2악장에서는 코로나 시기 역병을 물리치는 처용무에서 영감을 얻은 ‘수제천’의 단편이 등장했다. 피리 연주자 진윤경과 대금 연주자 김태환은 IBK챔버홀 전체를 밀어붙이는 강한 호흡의 사운드를 들려줬다.

반면 서양 목관악기군은 전통악기의 압도적인 호흡과 음량 앞에서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흐려졌다. 국악기의 숨결이 공간 전체를 장악하는 순간이었다. 김동현의 솔로는 ‘칼의 노래’라는 별칭이 어울릴 만큼 날카롭고 매서웠다. 수제천의 단편이 등장할 때마다 음악 속 번민과 고뇌가 일시적으로 정화되는 듯한 감각도 인상적이었다.

3악장에서는 무당의 굿 장단과 춤동작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현악군과 관악군이 반복적으로 밀려오는 불안한 음향을 만들자 독주 바이올린은 마치 도망치다 끝내 맞서 싸우기로 결심한 인물처럼 격렬한 속주를 몰아붙였다. 피리와 관악기의 거친 충돌 위로 첼로와 베이스가 역동적이면서도 희망적인 에너지를 보태며 작품의 긴장을 끝까지 끌어올렸다.

서양악기만으로 재탄생한 <영산회상>

정치용이 지휘한 조이오브스트링스의 <영산회상> / 사진. 스테이지원 제공.

정치용이 지휘한 조이오브스트링스의 <영산회상> / 사진. 스테이지원 제공.

이날 공연의 핵심인 2부 메인 프로그램 <메타모르포시스: 영산회상>은 석가모니의 영산회상 법회를 찬양한 고려시대 불교 성악에서 출발해 조선후기 풍류음악으로 발전된 대표적인 전통 기악 모음곡인 <영산회상>을 변용한 작품이다.

김인규는 <강강술래>와 달리 영산회상을 서양악기로만 구성된 오케스트라로 재탄생시켰다.작품의 중심을 이끈 악기는 더블베이스였다. 연주자들은 활뿐 아니라 손으로 현을 뜯고 두드리며 거문고와 해금의 질감을 재현해냈다. 서양악기의 배음 구조 안에서 우리 전통 가락의 숨결을 살리려는 시도였다.

1악장에서 더블베이스에서 시작해 바이올린 현악군과 클라리넷으로 이어지는 주제는 생명의 에너지를 떠올리게 했다. 2악장은 느린 호흡 속 호접지몽의 몽환성을 표현했고, 3악장에서는 김은혜의 팀파니가 전쟁 폐허 속 심장 박동 같은 불안한 음향을 만들어냈다. 그 위를 바이올린이 상승하는 선율로 가로질렀다.

4악장에서는 바순에서 클라리넷, 플루트, 오보에로 이어지는 목관 솔로가 인간의 희망과 번민을 표현했고, 마지막 5악장에서는 김은혜의 베이스드럼을 시작으로 모든 악기군이 합세했다. 여기에 트럼펫 백향민의 솔로가 더해지며 수행자가 끝내 깨달음에 도달하는 듯한 장대한 피날레를 완성했다.

완벽한 융합보다 ‘공존의 방식’을 찾다

1997년 창단한 조이오브스트링스는 내년 30주년을 맞는다. 현악 앙상블이라는 틀 안에 머물지 않고 장르와 공간을 넘나드는 실험을 이어온 이 단체는 이번 공연에서 단순한 창작 발표회를 넘어 “우리 음악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무대에서 직접 찾아냈다.

그 중심에는 단체를 창단해 29년간 꾸준히 이끌어 온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인 이성주 예술감독과 이왕준 후원회장이 있다. 명지의료재단 이사장이자 전주세계소리축제 조직위원장을 역임한 이왕준 후원회장은 오페라 연출가 요나김과 함께 창작 오페라 <심청>을 제작하는 등 오랜 시간 한국 음악의 현대화와 세계화를 고민해온 인물이다.

이번 <영산회상> 프로젝트 역시 단순한 이벤트성 협업이 아니라, 우리 전통 음악이 서양 오케스트라 시스템 안에서 어디까지 살아 숨 쉴 수 있는지를 확인한 실험이었다. 무대 위 국악기와 서양악기는 완전히 하나의 언어가 되지는 못했다. 대신 서로 다른 시간감각과 호흡, 음색의 차이를 끝내 지우지 않은 채 공존하는 방식을 찾아가는 듯했다. 더블베이스는 아쟁과 해금을 배음으로 떠받쳤고, 비올라는 서양과 동양의 두 세계를 연결하는 고리가 됐다. 피리와 대금이 전통적 호흡으로 공간을 밀어붙이면, 서양 현악군은 그 위에 정교한 구조와 긴장을 쌓아 올렸다.

결국 이번 공연은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단정적인 답을 내놓기보다, 서로 다른 언어들이 충돌하고 스며들며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실제 사운드로 보여준 무대였다. 조이오브스트링스는 이날 공연에서 단순한 ‘국악과 클래식의 결합’을 넘어, 한국적 오케스트라가 어디까지 가능할 수 있는지를 훌륭하게 증명했다. 같은 날 바로 옆 공연장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125년 역사의 빈 심포니 내한공연이 열려 그 의미를 곱씹게 했다.

조동균 기자 chodog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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