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적이면서 너무도 인간적인 이영애의 '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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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헤다 가블러’의 주인공 ‘헤다’ 역을 맡아 32년 만에 연극 무대에 선 배우 이영애(오른쪽)가 열연을 펼치고 있다.  LG아트센터 제공

연극 ‘헤다 가블러’의 주인공 ‘헤다’ 역을 맡아 32년 만에 연극 무대에 선 배우 이영애(오른쪽)가 열연을 펼치고 있다. LG아트센터 제공

“인생에서 한 번쯤 한 사람의 인생을 조종해보고 싶거든.”

타인을 가스라이팅하고 싶다는 속내를 거침없이 드러내는 연극 ‘헤다 가블러’ 속 주인공 ‘헤다’. 귀족 출신 헤다는 당대 최고의 여성 배우만 소화해온 캐릭터로, 당당함을 넘어 서늘한 아름다움과 뒤틀린 내면을 동시에 표현해야 하는 고난도 배역이다.

이 까다로운 헤다를 맡은 배우 이영애는 지난 8일 무대에 걸어 나오는 순간부터 우아한 카리스마로 헤다 역에 무언의 설득력을 불어넣었다. 32년 만에 연극 무대에 오른 이영애를 보기 위해 공연장을 찾은 관객 1300여 명을 일순간 숨죽이게 한 등장이었다.

◇32년 만에 연극 무대 오른 이영애

연극 헤다 가블러는 LG아트센터가 개관 25주년을 기념해 ‘현대극의 아버지’로 불리는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의 희곡을 무대화한 작품이다. 100년도 넘은 작품 속 헤다의 심연을 직관적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영국 유명 작가 겸 연출가 리처드 이어의 각색본을 바탕으로 제작했다.

작품은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헤다가 겪는 단 36시간을 그린다. ‘사교계의 팜파탈’로 숱한 남성의 관심을 즐기던 헤다는 결혼 이후 급격히 시들어간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여전하지만 집 안에서 헤다 자신은 교수 임용을 앞둔 남편의 ‘트로피 와이프’에 불과하다는 무력감에 갇힌다. 사랑 없이 결혼한 남편과는 어떤 교감도 나누지 못하고, 원치 않는 임신은 헤다를 더욱 궁지로 몰아넣는다. 헤다를 갉아먹는 우울증은 옛 연인 에일레트를 조종하고 싶다는 파괴적 욕망으로 분출되기에 이른다.

무대는 헤다가 느끼는 사회적 관습과 억압을 관객이 자연스럽게 공감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거대한 회색빛 무대를 채우는 건 배우 일곱 명과 작은 소품뿐. 질식할 듯 무거운 공기가 빠져나갈 창문은 찾아볼 수 없고, 배우들은 퇴장 없이 무대 한편의 의자에 앉아 헤다를 응시하며 압박 수위를 높여간다. 전인철 연출은 “이 공간(집)은 헤다의 정신적 감옥이며 내면세계”이며 “삼면의 벽은 헤다를 압박하는 사회적 질서”라고 설명한다.

◇베테랑 배우들 연기 감칠맛 더해

무대 위 라이브 영상을 벽면에 띄운 연출은 이영애의 섬세한 표정 연기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 하는 관객의 갈증을 충분히 해소해줬다. 특히 헤다가 총구를 겨누거나 에일레트의 원고를 불태울 때의 클로즈업 장면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김정호(조지), 지현준(브라크), 이승주(에일레트), 백지원(테아) 등 연극계 베테랑 배우들의 연기는 극에 안정감과 감칠맛을 더했다. 이영애와 조연 배우 간에 대사 호흡이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지만 공연 초반인 점을 감안하면 점차 개선될 것으로 보인다.

헤다는 일견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다. 타인을 통제하려 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은 억압받길 거부하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서다. “내가 아이를 태웠다”며 옛 연인 에일레트와 친구 테아가 쓴 자식 같은 원고를 서슴없이 불태우는 모습에선 사이코패스 같은 인상을 준다.

그러나 헤다는 우리에게 묘한 동질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고자 하고, 개인을 옭아매는 사회의 폭력에 어떤 식으로든 저항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자유를 되찾기 위해 되레 스스로 파멸의 길로 몰고 간 헤다의 선택은 비극적이면서도 누구보다 인간적이다. 헤다 가블러가 1890년대 작품이지만 지금까지도 이질감 없이 다가오는 이유다. 공연은 다음달 8일까지 LG아트센터에서 열린다.

허세민 기자 sem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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