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를 영화로 읊다]〈95〉세상의 모든 음악
알랭 코르노 감독의 ‘세상의 모든 아침’(1991년)에선 17세기 프랑스의 비올라 다 감바 음악가였던 생트 콜롱브와 그의 제자 마랭 마레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마레는 엄격한 콜롱브에게 가르침을 거절당하자 콜롱브의 오두막집 아래 숨어 연주를 엿듣는다. 같은 세기 조선의 거문고 명인 김성기(金聖器)의 음악 이력을 읊은 시에서도 비슷한 일화가 나온다.조수삼은 하층 인물들의 삶을 기록한 추재기이에서 김성기의 특별한 사연을 조명했다. 김성기는 왕세기에게 거문고를 배웠는데, 왕세기는 새 곡조를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러자 김성기는 밤마다 왕세기의 집 창밖에서 엿듣고는 다음 날 아침이면 그대로 연주하였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왕세기가 어느 날 연주하다 말고 갑자기 창문을 열어젖히자 김성기가 놀라 땅바닥에 나가떨어졌다. 김성기의 열정을 기특하게 여긴 왕세기는 자신의 음악을 다 가르쳐줬다고 한다. 이 시는 다른 전기들과 달리 김성기의 음악에 대한 열정에 집중하여 그의 진면모를 포착했다.시의 후반부는 왕세기의 말을 대변하는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마지막 구는 하나라의 명궁 예의 제자였던 방몽이 예가 없어야 자신이 최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스승을 배신했던 고사(맹자, ‘離婁下’)를 들어 사제 간의 신뢰를 강조했다.
영화는 늙은 마레가 스승에 대해 회상하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진정한 음악을 추구하라는 스승의 바람을 저버리고 궁정악사가 된 마레는 자신의 음악이 감미롭고 화려하기만 할 뿐이라고 자책한다. 반면 음악에 대한 열망으로 불꽃같이 세상을 밝혀준 스승은 음악 자체였다고 회고한다.김성기의 제자 남원군(南原君)은 스승의 장례를 치른 뒤 “백아의 거문고를 청산에 새로 묻으니, 이제 천하에 옛 음악이 끊어지네(靑山新葬伯牙琴, 天下於今絶古音)”라고 추모했다. 춘추시대 전설적인 연주자인 백아에 빗대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스승의 음악을 기린 것이다.
영화 속 콜롱브는 음악의 본질에 집중하고 부와 명예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왕 앞에서 연주하는 것마저 거부하여 미움을 사기도 했다. 김성기 역시 음악적 자부심이 대단하여 당시 위세가 대단했던 간신 목호룡의 연주 요청을 거부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악사로 인정받았음에도 만년에는 콜롱브처럼 세상과 인연을 끊고 마포 강가에 숨어 버렸다.
영화 속 세상 모든 음악의 끝은 죽음이라는 대사처럼 그들의 음악도 죽음과 함께 사라졌다. 하지만 남긴 여향(餘響)만큼은 유장하다. 김성기와 콜롱브의 음악이 감동을 주는 이유는 그들이 세속적 가치보다 음악의 본질에 집중했기 때문일 것이다.
임준철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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