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마다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싶은가 [장석주의 영감과 섬광]

4 weeks ago 11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3월은 시간이 더디 흘러가는 달이다. 세월은 느리고 나날은 지루하다. 아마도 이 지루함은 삶의 공허가 만드는 기분일 것이다. 그렇다고 삶이 환멸스럽거나 괴롭지는 않다. 몸은 멀쩡하고 마음에 주름진 데 없건만 사는 게 명쾌하거나 명랑하지는 않다. 살아도 사는 것 같지가 않다. 술꾼이라면 기분 전환을 위해 동네 술집을 기웃거렸을지도 모른다. 당구를 좋아했다면 당구장에서 친구들과 밥값 내기 당구라도 치거나, 주말 경마장에 가서 푼돈을 걸고 헛된 희망에라도 매달렸을지 모른다. 하지만 술은 끊은 지 오래고, 당구는 칠 줄 모르며, 경마장은 서른 해 전 친구 따라 딱 한 번 가본 적밖에 없다.

지루함 벗고 생동의 시간으로

지루함이란 무엇인가라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내 생각에 지루함과 한가함은 한 통속이다. 한가한 사람만이 지루함에 빠지는 까닭이다. 바쁜 사람이라면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을 테다. 빈둥거려도 그럭저럭 먹고살 수 있는 사람, 딱히 바쁘게 할 일이 없는 사람, 욕망의 대상이나 원인을 잃어버린 사람, 지독한 결핍감도 느끼지 못한 채 아무 갈망 없이 사는 사람이 지루함에 빠질 확률이 높다. 지루함이란 딱히 흥미도 관심사도 없이 지속하는 밋밋한 감정, 설렘이나 기쁨이 고갈된 마음 상태, 그 정도가 하찮은 불행의 체감이다. 나는 꽤 오래전부터 지루함을 단단한 불행을 망치로 두드려 얇게 펼친 상태일 거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400만 년 전 출현한 직립 보행하는 초기 인류는 지루함을 모르고 살았을 테다. 초기 인류는 사냥과 채집 활동을 하며 굶주린 배를 채울 무언가를 구하느라 바빴을 테니 말이다. 언제부터 인간은 지루함을 느끼게 됐을까? 그것은 인류가 불과 농업을 발명하고 식량 조달이 수월해진 가운데 정주 생활을 한 이후가 아닐까? 삶의 안정성이 확보된 뒤 여유와 한가함 속에서 인간 내면에 지루함의 기미가 싹튼 것은 아닐까?

지루함에 빠진다면 행복할 수 없다. 파스칼이란 철학자는 지루함을 “사건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꺾인 것”이며 “신 없는 인간의 비참함”이라고 말한다. 내 경험에 따르면 지루함은 갈망과 자유의 불가능성 속에서 솟는 독버섯이다. 뜻밖에도 많은 사람이 삶에서 지루함을 느낀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지루함이란 별자리에서 사는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지루함이란 존재의 공회전, 의미 생산이 불가능해진 시간의 다른 이름이다. 우리는 지루함 속에서 생명을, 가능성을 조금씩 침식당한다. 이것에서 벗어나는 일은 영혼 고쳐 쓰기일 테다. 낡은 영혼이 죽고 새 영혼을 살려내는 일이다. 어떻게 이 지루함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지루함을 무찌르고 기쁨과 설렘으로 생동하는 시간을 되찾을 수 있을까?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아//목련꽃 그늘 아래서 긴 사연의 편질 쓰노라/클로버 피는 언덕에서 휘파람 부노라/아 멀리 떠나와 깊은 산골 나무 아래서 별을 보노라/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아”(박목월 작시, 김순애 작곡, ‘4월의 노래’).

생명의 등불을 켜 드는 4월

나는 시를 쓰고 목련꽃을 사랑한 소년이었다. 어쩐 일인지 내가 자란 시골 마을에는 목련나무가 없었다. 들판과 황토와 야산이 전부인 척박한 땅이었다. 열 살 때 서울로 올라와 난생처음 목련나무와 우아하게 피어나는 목련꽃을 봤다. 연초록 잎이 돋기 전 하얀 꽃봉오리를 먼저 내미는 목련꽃에 홀려 탄성을 내지르곤 했다. 모르긴 몰라도 목련꽃에 감탄하던 내 대뇌는 도파민에 젖었을 테다.

‘4월의 노래’라는 가곡을 좋아한 것도 목련꽃과 연관이 있었을 테다. ‘4월의 노래’는 기쁨과 설렘을 주던 노래, 먼 곳에 대한 동경과 그리움을 알게 해준 노래다. 깨끗한 이마를 가진 소녀를 향한 그리움을 품으면서 이 노래는 더욱 좋아졌다. 그래서 변성기를 넘긴 음치 주제에 부끄러운 줄도 모른 채 거위처럼 꽥꽥대며 이 노래를 불러 젖혔다. 노래를 부르노라면 생명의 등불을 켜 든 느낌과 그리움과 설렘이 가슴 가득 차올랐다.

하늬바람 타고 오는 꿈의 계절

가난한 산동네 소년의 봄날이 그토록 찬란했던 것은 ‘4월의 노래’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 시절은 아직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란 소설을 읽기도 전이다. 목련꽃 그늘 아래에서 누군가가 보낸 편지를 쓴 적도, 누군가에게 편지를 받아 읽은 적도 없었지만 나는 4월이 꿈의 계절이라는 것, 누군가를 사랑한 적도 없지만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다시 ‘4월의 노래’를 부른다. 심장이 뛴다. 가슴이 설렌다. 어제보다 더 착하게 살고 싶다.

봄을 뱀이 눈뜨고 초록 제비가 묻혀 오는 하늬바람의 계절이라고 한 시인의 계절 감각에 박수를 치고 싶다. 하늬바람을 타고 꿈의 계절이 돌아온다. 미나리 향이 떠돈다. 지병 하나쯤은 떨치고 일어나서 잃었던 입맛을 되찾아야 한다. 아, 온몸에 새 피가 돌고 나는 살아봐야겠다. 봄이 돌아올 때마다 나는 왜 이렇게 심장이 뛰며 살고 싶은가!

신의 축복처럼 목련꽃 피는 4월이 오면 생명의 등불을 높이 쳐들자. 마음에 자욱한 지루함을 무찌르고 그 빈자리에 희망 몇 포기를 모종하자. 우리 앞에 놓인 날들이 “벼락과 해일만이 길일지라도/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서정주, ‘꽃밭의 독백’)라고 외쳐보자. 땅에서 새싹이 돋듯 기쁨과 갈망이 솟고, 차가운 잿더미에서 불꽃이 살아나듯 기어코 삶이, 부흥이 이뤄져야 한다. 천지간에 목련꽃이 피어나 화창해질 때 궁색한 살림은 펴지고, 칙칙한 기분에는 큰 기쁨이 지펴지길 바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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