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뜩이는 영감은 어디서 오는가 [고두현의 문화살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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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를 연주하는 아폴론과 영감을 주는 아홉 명의 뮤즈를 그린 라파엘로의 ‘파르나소스’(부분).

악기를 연주하는 아폴론과 영감을 주는 아홉 명의 뮤즈를 그린 라파엘로의 ‘파르나소스’(부분).

올해는 덴마크 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1805~1875)이 세상을 떠난 지 150년이 되는 해이고, 4월 2일은 그가 220년 전 가난한 구두 수선공의 집에서 태어난 날이다. 그는 11세 때 아버지를 여읜 뒤 직조공과 재봉사 견습생으로 일했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빈곤층을 위한 자선 학교에 다녔다. 연극배우를 꿈꾸며 희곡을 썼지만 맞춤법이 서툴러 퇴짜를 맞곤 했다.

그가 동화를 쓰기 시작한 것은 30세 때였다. 처음에는 어린 시절 들은 민간 설화를 각색하다가 32세에 순수 창작품인 <인어공주>로 극찬을 받자 용기를 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쓴 동화가 156편에 이른다. 그의 작품은 어린이와 어른 모두에게 사랑받으며 125개 이상 언어로 번역돼 읽히고 있다.

'성냥팔이 소녀' 모티브는 엄마

동화 장르를 개척한 덴마크 작가 안데르센.

동화 장르를 개척한 덴마크 작가 안데르센.

‘동화의 아버지’ ‘창작 동화의 개척자’로 불리는 그의 영감은 어디에서 왔을까. 평론가들은 그가 겪은 극도의 빈곤과 놀림, 왕따 경험에서 영감의 원천을 발견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일용직 노동자 신세로 전락했고 못생긴 외모를 지닌 데다 키만 멀대같이 컸다. 코와 발도 지나치게 컸다. 소년 시절 연극 무대에 서려고 했지만 변성기 때문에 이상한 소리를 내 심한 놀림을 받았다.

이런 경험이 <미운 오리 새끼>의 창작 모티브가 됐다. 어느 연못가, 엄마 오리가 품고 있던 알들에서 아기 오리가 태어났다. 그중에 외모가 다른 녀석이 하나 있었다. 주변 오리들은 녀석을 괴롭혔다. 견디다 못한 아기는 연못가를 떠나 여러 곳을 떠돌다가 어른이 된 뒤 자신이 오리가 아니라 백조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 얘기에는 작가 데뷔 후에도 출신 때문에 홀대받은 안데르센의 아픔이 그대로 스며 있다.

대표작 <성냥팔이 소녀>는 먹을 게 없어 구걸해야 했던 그의 어머니에게서 영감을 얻었다. 어머니는 교육을 받지 못해 글도 읽지 못하는 세탁부였다. 한겨울 추위에 떨며 맨발로 성냥을 파는 소녀, 성냥 불꽃에 비치는 난로와 음식의 환상, 별똥별 속 할머니 환영 등이 어머니의 신산한 삶과 겹친다. 영화 ‘겨울왕국’의 원작 <눈의 여왕>은 아버지가 나폴레옹 전쟁 참전 후 사망했을 때 “눈의 요정이 아버지를 데려갔다”는 말을 들은 데서 힌트를 얻었다.

그러고 보니 많은 문학작품의 영감이 작가의 경험에서 나왔다. 안데르센이 좋아한 작가 찰스 디킨스는 아버지가 감옥에 가는 바람에 12세 때부터 공장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올리버 트위스트>를 썼다. 허먼 멜빌은 포경선의 선원 체험을 <모비 딕>에 담아냈고, 너새니얼 호손은 세관 창고에서 주홍빛 글자 장식을 보고 <주홍글씨>를 썼다. 프란츠 카프카는 보험공사에서 일하며 <변신> <성> 등을 집필했다. “경험은 글을 잘 쓰는 모든 이의 안주인”(레오나로도 다빈치)이라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20세기 클래식 황제’로 불린 지휘자 카라얀.

‘20세기 클래식 황제’로 불린 지휘자 카라얀.

음악 분야도 그렇다. ‘20세기 클래식 황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에게 지휘자의 꿈을 꾸게 한 것은 발전기 레버였다. 그는 6세 때 수력 터빈으로 작동하는 발전기의 긴 레버를 아래로 잡아당기는 일을 도왔다. 발전기에서 굉음이 울리고, 어둠 속에서 섬광이 번쩍이며, 도시에 빛이 들어오는 장면이 너무나 강렬했다. 그때 레버를 잡아당긴 동작처럼 인간에게 최고의 음과 빛을 선사할 수 있는 직업, 그게 바로 여섯 살 체험에서 얻은 ‘지휘의 영감’이었던 것이다.

영감은 육체의 경험과 영혼의 숨결이 함께 빚어내는 창조의 불꽃이다. 영감을 뜻하는 영어 인스피레이션(inspiration)은 ‘숨을 불어넣다’는 의미의 라틴어 인스피라레(inspirare)에서 왔다. 신이 인간에게 불어넣어준 ‘생명의 숨’이 곧 영감이다. ‘영감을 주는 여신’ 뮤즈(muse)는 그리스 신화 속 제우스와 므네모시네 사이에서 태어난 9명의 딸 무사이(mousai, 단수형은 무사·mousa)에서 유래했다. 이들의 영감으로 창작된 것을 무지케(mousike)라고 했고, 이는 뮤직(music)의 어원이 됐다. 박물관을 의미하는 뮤지엄(museum)도 여기에서 나왔다.

옛 문인과 예술가들은 무사이 여신들의 신전을 찾아 영감받기를 소원했다. 고대 그리스의 많은 문학작품이 첫머리에서 이 여신을 불러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노래하소서, 여신이여!”로 시작하고 <오디세이아>는 “들려주소서, 여신이여!”로 첫 장을 연다.

"삶, 신의 손가락으로 쓰인 동화"

번뜩이는 영감의 숨결, 성스러운 뮤즈를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오랫동안 축적된 경험의 기억이 몸속 세포와 만나 새로운 불꽃을 피우도록 해야 한다. 뇌과학자들은 영감의 촉매를 ‘아세틸콜린’이라는 뇌 신경전달물질과 ‘시터파’라는 뇌파에서 찾는다. 아세틸콜린은 여러 경험과 기억을 엮어 영감의 불을 일으키는 부싯돌 역할을 한다. 아세틸콜린이 해마를 자극하면 시터파가 많이 생성되고 시냅스(신경과 신경의 접합)가 쉽게 연결되면서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가바사와 시온 일본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아세틸콜린과 시터파 생성을 돕는 방법으로 낮잠 자기, 호기심 자극하기, 산책하기, 앉은 채로 손발 움직이기 등을 권한다. 아울러 “아세틸콜린 원료인 레시틴이 풍부하게 함유된 식재료는 달걀노른자와 대두, 곡류, 간, 땅콩류”라며 “평소 달걀과 두부 된장국, 견과류를 많이 먹는 게 좋다”고 말한다.

좋은 영감은 이처럼 경험과 기억, 뇌파와 시냅스, 낮잠과 호기심, 달걀과 콩, 육체와 영혼의 입체적 교감에서 나온다. 자기 분야의 고전 명작을 많이 읽고 깊이 성찰하는 것도 중요하다. 좋은 작품을 쓰려면 많이 읽어야 한다. 멋진 선율을 원하면 많이 들어야 한다. 안데르센도 선대 문학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벌거벗은 임금님>은 중세 스페인 이야기를 토대로 했고 <하늘을 나는 트렁크>는 아랍 구전 문학 <천일야화>에서, <장미 요정>은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앞선 이의 영감과 성찰을 내 것으로 만드는 순간 우리는 태초에 신이 불어넣어준 ‘생명의 숨’과 함께 은밀하고도 신비로운 ‘뮤즈의 손가락’을 만날 수 있다. 안데르센이 “모든 사람의 일생은 신의 손가락으로 쓰인 동화”라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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