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슬라는 설립 18년 만인 2020년에야 흑자 전환했다. 긴 고난의 시기를 버티는 데 유상증자가 한몫했다. 2010년 나스닥 입성 후 수 없이 많은 증자로 부족 자금을 충당했다. 7조원 유증 3개월 만에 다시 7조원 유증에 나선 적도 있다.
기업 상장의 최대 목적은 자금 조달이고, 그 대표적 수법이 유상증자다. 만국 공통의 증시 작동 방식이다. 한국에선 꽤나 다르다. 유상증자 때마다 ‘주주 돈 공짜로 빼먹느냐’는 비난에 시달린다. 주주 가치를 훼손한다며 유증 자체를 범죄시하는 분위기도 적잖다.
엊그제 2조원(16.8%) 유상증자를 발표한 삼성SDI가 사정권에 들었다. ‘주주 알기를 개뼉다구로 안다’는 정도는 양반이다. ‘주주 이익에 철저히 반하는 악질적 배임’이라며 금융당국 신고와 국민신문고 고발 움직임이 본격화했다.
격한 반응에 놀란 금융감독원은 증자 당위성, 이사회 논의, 주주 소통 계획을 현미경처럼 들여다보겠다고 선언했다. 여차하면 유상증자 신고서를 반려할 태세다. ‘배터리 캐즘’을 돌파하기 위한 사활적 경영 판단을 배임으로 몰아가는 데 정부가 앞장서는 모양새다.
개미들은 주가 약세가 ‘주주 가치 훼손 증거’라며 분노하지만 과잉 반응이다. 유상증자 후 일시적 주가 하락은 다반사다. 확보한 자금의 효율적 사용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다. 재무 개선·투자 확대 기대가 확산하며 오래지 않아 낙폭을 만회하는 사례가 많다.
갑작스런 일방적 증자에 뒤통수 맞았다는 주장도 찬찬히 짚어봐야 한다. 두어 달 전부터 유상증자설이 꾸준했다. 글로벌 치킨게임이 정점으로 치닫는 순간 삼성SDI는 ‘안정’ 대신 ‘성장’이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버거운 경쟁자 중국 BYD의 보름 전 8조원 유증, 도널드 트럼프 시대 ‘미국 투자 독려’의 국제 정치 역학까지 고려했을 것이다.
주주 가치 희석 주장 역시 너무 단선적이다. 발행 주식이 늘지만 새 돈 유입은 그 자체로 기업의 자산 가치를 끌어올린다. 증자 발표 전날 기관발 매물이 대량 출회한 점은 의심스럽다. 하지만 선행매매·내부거래 조사로 대처할 일이지 증자 철회 압박은 무리수다.
유상증자 과민 반응에서 보듯 한국의 투자 문화는 유난스럽다. 먼 미국 땅에서 ‘K팝·드라마를 좋아하지만 K증시는 디스토피아’(오언 러몬트 아카디안운용 부사장)라는 보고서가 나올 정도다. 러몬트 부사장은 사실·논리가 아니라 음모·분노의 정서가 지배하는 저질 투자 문화를 ‘코리아파잉’(koreafying·한국화)이라는 신조어로 일반화했다.
그가 지목한 한국화의 주요 특징은 ‘증시 정치화’다. 정치적 결사에 능숙한 개미들의 맹활약 덕분에 선진 증시에선 상상하기 힘든 공매도 전면 금지가 시행된 점을 거론했다. ‘강경 반대’했던 금융위원장이 한 달 만에 입장을 급선회해 총선 5개월 전 전격 도입했다는 점에서 반박이 궁해진다.
코리아파잉의 폐해는 상법개정에서도 확인된다. ‘이사에 대한 주주 충실의무’의 부당성은 연초 국회 법사위 공청회에서 분명히 확인됐다. 찬성 측 패널조차 ‘현재 상법에 투자자 보호 장치가 충분하다’ ‘주주 충실의무를 명문화한 나라는 없다’고 인정했다. ‘다만 투자자 불만과 오해가 큰 만큼 개정을 고려할 만하다’고 물러섰다. 결국 1500만 개미들의 정치적 압력을 제외하고는 상법개정을 정당화할 근거를 찾기 어렵다.
기업과 대주주 악마화도 코리아파잉의 단면이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은 모든 혐의에 무죄판결(1·2심)이 내려졌다. ‘삼성물산 주주들이 이익을 봤다’는 판단도 곁들여졌다. 그래도 음모론자들은 작은 꼬투리를 과장 및 왜곡해 분노를 부추긴다. LG에너지솔루션 물적분할도 마찬가지다. ‘소액주주의 이익 기회가 외려 커졌다’는 논문도 나왔지만 대주주 독식 탓에 주가가 급락했다는 일방적 선동은 더욱더 기승이다.
예민한 후각의 포퓰리즘 정치는 일각의 편향과 탐욕을 동력삼아 혐오를 확산한다. 표가 되기 때문이다. 약자인 개미는 공정 대우를 넘어 때론 더 배려받아야 한다. 하지만 절대선일 순 없다. 코스닥시장 평균 보유 기간은 3개월에 불과하다. 반면 기업과 대주주는 사즉생 각오로 판을 바꾸려는 진화론자의 속성을 갖는다. 물론 악덕기업주는 예외다. 큰돈과 때로 인생을 건 그들의 승부에도 걸맞은 응원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