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용과 손열음의 시절 인연…피아노 천재의 운명을 바꾸다

23일은 고(故) 박성용 금호그룹 명예회장(1932~2005)의 20주기다. 피아니스트 손열음(39)이 이날 금호아트홀 연세에서 고인을 기리는 추모음악회를 연다. 1998년 고인과의 첫 만남에서 연주한 곡과 2005년 마지막으로 연주한 곡, 또 지금 들려드리고 싶은 곡들을 모아 연주한다. 금호영재로 시작해 세계 무대를 누비는 피아니스트가 되기까지, 손열음은 자신을 포함해 당대 클래식 음악계를 두루 살피며 후원했던 그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살면서 점점 더 생각난다고 했다. ‘한국의 메디치’라 불리는 박 명예회장의 뜻을 돌아본다.

1977년, 박 명예회장은 당시 마흔다섯 살로 금호실업 대표였다. 2억원을 출자해 금호문화재단을 만들었다. 공직자, 대학교수를 거쳐 부친인 박인천 금호그룹 창업주의 권유로 경영자의 길을 걸은 지 겨우 3년 차. 그때 이런 말을 남겼다. “문화예술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고, 젊음을 사랑한다는 것이며, 인류의 미래를 믿는 것이다.”

클래식 음악계의 전무후무한 키다리 아저씨 고 박성용 명예회장. 그는 아시아나항공을 설립해 금호아시아나를 굴지의 그룹으로 성장시킨 경영인이다. 약 3년간의 짧은 공직 생활을 떠나 1971년 서강대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다, 1974년 금호실업 대표에 취임하면서 본격적인 경영인의 길을 걸었다. 1984년 선친 타계 후 그룹 총수에 오른 고인은 계열사 간 합병과 과감한 구조조정으로 취임 당시 6900억원이던 그룹 매출을 1995년 4조원으로 끌어올리는 등 눈부신 성과를 냈다. 창사 이후 가장 화려한 실적을 낸 이듬해, 동생 박정구 회장에게 총수직을 물려줬다. 경영 일선에서 떠난 1996년부터는 음악 영재를 양성하는 일에 본격적으로 열정을 쏟았다.

음악 후원의 시작과 끝은 무대다

그는 음악을 사랑했다. 음악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대에 오른 연주자를 객석에서 묵묵히 지켜보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문화는 한 국가의 경쟁력이며 기업의 자산이기도 하다”는 박 명예회장의 말은 그저 선언에 그칠 수도 있었지만, 그는 기꺼이 ‘박수부대’를 자처했다. 금호의 클래식 영재들이 콩쿠르에 나가거나 콘서트를 열 때마다 “한국인으로서 박수부대로 그곳에 직접 가서 응원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고, 실천했다.

박 명예회장의 수많은 업적 중 하나를 꼽으라면 ‘무대를 만든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음악 영재여도 설 무대가 없었다면 세상이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당시 금호콘서트는 ‘클래식 등용문’으로 통했다. 매년 5월과 11월 두 차례 ‘금호 영재’, ‘금호 영 아티스트’, ‘금호 영 체임버’ 등 3개의 콘서트 오디션을 거쳐 영재를 발굴했다. 지금까지 2000명이 넘는다. 클래식 음악계의 권위 있는 심사위원이 선발한 연주자들은 이후 ‘금호영재콘서트 시리즈’, ‘금호영아티스트콘서트 시리즈’, ‘금호영체임버콘서트 시리즈’에서 데뷔 무대에 섰다. 김규연, 김선욱, 손열음, 조성진, 김혜진, 권혁주, 신현수, 이유라, 윤소영, 장유진, 이정란, 이상은, 성민제, 선우예권, 김봄소리, 임윤찬, 한재민 등 국내외에서 활약하고 있는 정상급 연주자 대부분이 이 무대를 통해 데뷔했다.

영재는 기르고 문화는 가꾸고

금호문화재단의 철학은 쉽고 명료하다. ‘영재는 기르고 문화는 가꾸고’. 박 명예회장은 문화예술의 꽃을 피우는 것이 얼마나 오래 걸리는 일인지 예견했다. 어쩌면 자신의 남은 생에 꽃망울조차 볼 수 없을 거라는 사실도. 그럼에도 영재를 발굴하는 일에 모든 열정을 쏟게 만든 건 ‘인류애’였다.

“어린이들에게 문화예술을 가까이 할 기회를 만들어줍시다. 순수예술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어른이 되어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은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2000년 그룹 사옥을 서울 회현동에서 신문로로 옮길 때 박 명예회장은 “서울 한복판에도 제대로 된 실내악 연주회장이 있어야 한다”며 건물 3층에 ‘금호아트홀’을 마련했다. 이제 막 피어나는 클래식 음악계의 작은 별들이 무수히 반짝이는 곳이었다. 여기엔 그의 지정석이 있었다. 중앙 통로 바로 앞줄 왼쪽 블록의 맨 오른쪽 통로 옆자리. G열 7번이 거의 그의 지정석이었다. 모든 공연을 직접 표를 사서 본 그의 좌석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좋은 자리와는 거리가 멀지만, 피아니스트의 손이 가장 잘 보이는 곳이었다. 별세하기 전 그는 자택에 자신의 호를 딴 ‘문호(雯湖)홀’을 만들어 음악가들의 하우스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2년밖에 안 돼 문을 닫아야 했지만, 클래식 음악가들은 아직도 그곳을 사랑방이자 한국의 유일무이한 ‘클래식 살롱’으로 기억한다.

뛰어난 영재에게 최고의 악기를

무대 제공과 함께 음악가들이 기억하는 박 명예회장의 ‘통 큰 후원’은 악기였다. 1993년부터 세계적인 명품 고악기를 구입해 장래가 촉망되는 연주자들에게 무상으로 대여하는 ‘악기 은행’ 제도를 운영했다. 과다니니, 과르네리, 몬타냐나, 테스토레 등 명품 바이올린과 로카, 마치니 같은 고악기 첼로도 있었다. 피아니스트 손열음, 바이올리니스트 고 권혁주를 비롯한 수많은 연주자에게 꿈에 그리던 악기를 손에 쥐게 한 제도다.

박 명예회장은 ‘가장 중요한 대화는 밥상에서 이뤄진다’고 믿었다. 2003년 뉴욕 필하모닉 지휘자 로린 마젤이 한국에 왔을 때, 만찬을 직접 주선해 음악 영재들을 소개하고 오디션 기회를 만들어준 것도 그다. 자신이 발굴한 보석을 세계 무대와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는 데 누구보다 열성적이었다. 해외 유학 시절, 자신이 타지에서 겪은 이방인의 어려움이 떠올라서였을까. 음악가들이 해외 콩쿠르에 나갈 때면 그룹 지사 관계자나 해외 공관 등에 연락해 ‘따뜻한 밥 한 끼’를 챙겼고, 홀로 유학길에 오른 음악가를 살뜰히 살핀 이도 박 명예회장이다.

금호문화재단이 운영하던 ‘금호 영 뮤지션 매너스 스쿨’은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프로그램이다. 음악도들이 국제적 아티스트로 성장하기 위해 갖춰야 할 자기관리법을 가르쳤다. 사진 촬영 노하우는 물론 무대 매너, 무대 화장법, 테이블 매너, 자신을 효과적으로 홍보하기 위한 프로필 작성법까지 실전용 노하우를 빠짐없이 알려줬다.

박 명예회장의 예술 후원은 모세혈관에서 대동맥까지 전방위로 이어졌다. 아티스트 개인을 지원하는 일에서 멈추지 않았다. 기업인으로는 처음으로 예술의전당 이사장(1998년)을 맡았고, 통영국제음악제 출범 첫해 이사장, 외교통상부 공연자문위원장과 문화대사 등을 역임했다.

금호 영재 출신 음악가 4명(성악 서선영, 바이올린 이지혜, 피아노 손열음·조성진)이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나란히 시상대에 오른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6년 뒤의 일이다. 박 명예회장이 마지막으로 직접 후원한 조성진이 한국인 최초 쇼팽 콩쿠르 1위에 오른 건 그의 10주기를 맞이한 해다.

김보라/이해원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