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희 기자의 따끈따끈한 책장]출판담당 기자도 책 추천은 어려워

3 weeks ago 9

박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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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 단톡방에 ‘초중등용 권장도서 목록’이 올라온 걸 봤다. 입시학원에서 정리한 자료라는데, 칸트 ‘순수이성비판’, 니체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같은 건 그렇다 치자. ‘보바리 부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같은 책까지 포함돼 있어 놀랐다. 거칠게 줄거리만 요약해 보자면, 전자는 유부녀가 불륜 도중 파산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이야기 아닌가. 후자도 주인공의 외도와 외설이 서사의 중심축을 차지하는 책이다.

명문대 권장 도서란 이유로 초등학생에게 ‘잘못된 남녀관계’를 중심으로 세계의 균열과 불안을 그려낸 책을 추천하는 ‘아묻따’식 사교육 세태를 접하고 나자, 올바른 책 추천이란 무엇인가 질문을 던져보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을 추천한다는 건 사실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다. 좋은 책이란 읽는 사람의 연령대나 성별, 읽는 시기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위의 책들은 모두 명작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초등학생이 읽기 좋냐면 그럴 수는 없다.

좀 더 미시적으로 들어가면 가치관이나 취향에 따라서도 책 추천의 작동 방식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출판담당 기자는 볼만한 책을 추천해 달라는 요청을 종종 받게 되는데, 매번 난감함을 느낀다. ‘볼만하다’의 기준이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평소 그 사람의 취향과 독서력, 배경지식과 관심사 등에 대해 숙지한 상태에서만 타율이 높은 책 추천이 이뤄질 수 있다. 그렇다고 분명히 가벼운 의도로 ‘책이나 한 권 추천해 봐’라고 했을 상대에게 요즘 삶의 고민이나 관심사가 무엇인지 상담을 시작할 수도 없고.

일본 서점 쓰타야에는 ‘북 컨시어지’란 게 있다. 보통 서점에 가도 책 위치 물을 때 외엔 점원과 말을 섞을 일이 잘 없지만, 이곳에선 자신의 관심사나 생활 환경 등에 대한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북 컨시어지의 특화된 책 추천을 받을 수 있다. 책을 통해 독자들이 얻길 기대하는 위안, 즐거움, 정보 같은 걸 생각해 보면 책 추천이야말로 이처럼 정교한 커스터마이징이 중요한 분야다. 하지만 아직 이런 문화는 국내에선 보편화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렇다 보니 좋아하는 작가나 권위자의 추천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에도 리스크가 있다. 책이 정말 좋아서 추천하는 경우도 있지만 인간관계나 비즈니스 관계 등 여러 이해관계로 인해 실제 책의 가치와 무관하게 추천이 이뤄지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일종의 ‘주례사 추천’이랄까. 소위 ‘미디어 셀러’로 불리는 유명인 추천 도서 역시 이런 함정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추천인이 유명하다는 사실이 책의 수준을 보장하진 않는다. 자신의 삶의 맥락과 동떨어질 위험이 크다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고 말이다.

해결책은 결국 좋은 책을 보는 안목을 스스로 길러내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누군가의 추천에 의존한 독서는 스스로 갖춰가야 할 내면의 도서관을 확장시키는 데 한계를 가진다. 내면적 필요에 의해 선택한 책이 내 안에서 하나둘 주제별 서가를 이루고 확장될 때, 그 책들이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행성처럼 자전하고 공전하면서 하나의 우주를 이뤄 갈 때, 마침내 ‘교양 있는 독자’가 탄생한다. 그러고 보면 A대 권장도서, B대 권장도서 던져주는데 급급한 우리 독서 교육은 정작 가장 중요한 걸 빠뜨리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잘 읽을 줄 아는 것만큼, 잘 고를 줄 아는 게 중요한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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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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