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항저우의 서호 (사진=게티이미지) |
[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인류의 역사는 음식의 변천사이기도 하다. 우리의 밥상은 이미 과거의 밥상이 아니다. 조선후기의 기록에 성인남자는 7홉의 쌀로 한 끼 밥을 지어먹었다고 한다.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고 했지만 이제는 사실이 아니다. 최근 국민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집계가 시작된 1963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다. 요즘 사람들은 한 끼에 평균 밥 반 공기 정도로 버티고 있다. 반면에 육류소비량은 쌀 소비량을 추월하고 있다. 지난해 돼지, 소, 닭고기 등 3대 육류 소비량은 1인당은 60.6㎏으로 쌀 소비량을 넘어섰다. 우리경제의 산업화는 외식산업의 발달과 함께 식생활의 서구화를 가져왔다. 우리의 식탁에 20년 전만 해도 볼 수 없었던 브로콜리, 셀러리, 파프리카가 등장하고 식당에는 부대찌개, LA갈비 같은 정체가 모호한 음식들이 팔리고 있다. 인스턴트식품과 배달음식의 소비는 날로 늘어가고 있다.
한 시대의 음식문화 발전에는 항상 그러한 변화를 주도하는 인물이 존재한다. 그들은 새로운 식재료와 요리법을 개발하고, 그것을 즐기며 평가하는 사람들이다. 편리한 식기와 식탁예절을 도입하는 것도 그들의 몫이었다. 오늘날의 음식문화를 만든 이들이 누구이며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브리야 사바랭은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고 했다. 이제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아볼 때이다.
소동파의 동상 |
소동파는 고려와 조선에서 더욱 추앙받았다. 고려 말 삼은의 한사람인 이색은 목은집에 “저 우뚝한 동파 늙은이의 문장은 불꽃이 만 길이나 세차게 올랐네”라고 경탄했다. 권문해가 저술한 백과사전 ‘대동운부군옥’에는 “고려 문사들이 오로지 동파를 숭상하였기 때문에 매년 과거 합격자를 발표할 때면 사람들이 올해도 또 33명의 동파가 배출되겠다”고 한다는 일화가 나와 있다. 조선 전기의 서거정은 ‘사가집’에 “선생의 기개와 절조는 우주를 능가하고, 선생의 문장은 별처럼 빛나는구나”라며 그를 극찬했다. 심지어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과 동생 김부철의 이름은 소동파를 흠모한 그들의 부친 김근이 동파의 이름 식과 동생 소철의 이름에서 따서 지었다고 한다. 조선의 시서화 3절 신위는 해마다 소동파의 생일이면 제사를 지냈고 조선 말기에는 소동파를 숭배하는 모임인 ‘배파회’도 곳곳에서 열렸다. 이 정도면 소동파 열풍이 아닐 수 없다.
소동파 전적벽부 (사진=대만 국립고궁박물원) |
훗날 먼 이국땅에서도 이토록 존경받은 소동파지만 당대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그는 22세의 젊은 나이에 과거 급제한 뒤 우여곡절 끝에 벼슬길에 나갔다. 그러나 그의 강직한 성품과 자유로운 천성으로 인해 관직생활은 투옥과 유배, 지방관으로 전출, 재등용이 반복될 정도로 순탄치 않았다. 당시 북송은 왕안석일파가 균수법, 청묘법 등 신법을 주창하며 급진적인 개혁을 시도하자 당쟁이 격화되어 정치가 혼란에 빠져 있었다. 소동파는 백성들의 삶을 힘들게 하는 신법을 싫어했다. 당시 그는 반대의 뜻을 “독서가 만 권에 달해도 율은 읽지 않는다”고 은유적으로 밝혔는데 그로 인해 옥고를 치른 뒤 황주로 유배를 가게 된다. 그것이 바로 ‘오대시안’으로 전해지는 유명한 필화사건이다.
황주에서의 생활은 곤궁하고 비참했다. 부인은 양잠을 했고, 동파는 친구의 주선으로 군대가 주둔했던 황무지를 빌려 힘들게 농사를 지었다. 그 시절 그 농토를 동쪽 언덕이란 뜻의 동파라 부르고, 자신을 동파거사라고 칭했다. 소동파는 그곳에서 훗날 자신에게 세계적인 미식가로서의 명성을 안겨줄 인생역전의 계기를 마련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동파육의 탄생이다. 소동파는 낙천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유배를 당해 오지에 내쳐지지만 웃음을 잃지 않고 백성과 어울리며 현지에 잘 적응했다. 소동파의 인품이 얼마나 고매했는지는 무려 500년 뒤 조선인 허균이 ‘성소부부고’에 남긴 탄성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이 분은 텅 빈듯하면서도 한없이 넓은 마음씨로서 사람들과 경계를 다투지 않으셨다. 현명하거나 어리석거나, 귀하거나 천하거나를 막론하고 모두 즐겁게 어울렸으니 유하혜의 화광동진의 풍모를 갖춘 분이었다. 나는 그분을 본받고 싶지만 역부족이다.”
동파육 |
그 시절 황주에는 돼지고기가 흔하고 쌌는데 사람들이 양고기를 선호하기 때문이었다. 소동파는 요리에도 재주가 있어 그 돼지고기로 동파육을 개발했다. 그즈음 그는 돼지고기를 칭송하는 ‘저육송’을 남겼는데, 내용에는 당시의 상황과 조리법이 간명하게 잘 묘사되어 있다. 일부를 옮겨본다.
“황저우의 좋은 돼지고기는 / 값이 진흙처럼 싸구나 / 부귀한 자는 먹으려 하지 않고 가난한 이는 요리할 줄을 모르네.”
이런 상황에서 고안된 동파육은 훗날 항주에서 빛을 보게 된다. 소동파가 항주태수로 부임했을 때 여름에 폭우가 내리면 서호가 범람하고, 가뭄이 들면 물이 부족해서 농민들이 고생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동파는 지방관으로 전전하면서 치수에 경험을 쌓아 일가견을 갖고 있었다. 그는 즉각 사람을 동원하여 서호에 긴 제방을 쌓고 수로를 뚫었으며 다리도 놓았다. 그 덕분에 호수의 환경이 대폭 개선되어 백성들이 물의 혜택도 보고 아름다운 경관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 제방이 바로 소제다. 사람들은 소동파를 칭송하며 답례로 그가 좋아하는 돼지고기를 많은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선물했다. 그는 받은 돼지고기를 자신의 요리 비법으로 만들어 나눴다. 음식을 맛본 백성들이 맛있다고 칭찬하면서 동파육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 이름을 얻게 된 계기다.
동파육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난무한다. 소동파가 황주에서 값싼 돼지고기로 처음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는 설, 원래 있던 홍소육을 소동파가 항주사람들에게 요리해 주자 동파육이라고 부르게 됐다는 주장, 사람들에게 돼지고기 요리를 만들어 황주와 함께 대접하라고 했는데, 요리사가 실수로 황주를 함께 넣고 조리해서 탄생했다는 이야기 등 다양하다. 그런 여러 가지 의견들의 결론이 다 소동파로 마무리된다는 점에서 어찌됐든 동파육이 그의 작품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 경과야 무려 천 년 전의 일이니 정설을 확인할 길은 없다. 어쨌거나 동파육은 오늘날 세계적인 요리가 되었다.
동파병 |
소동파는 술에 대해서도 대단한 식견을 가졌던 모양이다. 하기야 음식과 술은 대개 함께하는 것이니 그가 술에 대해서 잘 알았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소동파의 주량은 그리 많지 않았던 듯 도연명의 ‘음주 20수’에 대한 화답시 서문에서 “내가 술을 마시기는 하지만 주량이 아주 적어서, 언제나 술잔을 들고 즐거움을 삼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소동파의 술에 대한 취향은 즐기는 수준이 아니라 갖은 술을 직접 빚는 경지였다는 점에서 남다르다. 그는 유배를 가든 지방관으로 가든 가는 지역마다 그곳에서 나는 재료로 술을 담갔다. 예를 들어 황주에 있을 때는 밀주와 압모시주를 빚었으며 혜주에서는 계주를, 담주에서는 진일주, 변경에 있을 때는 동정춘색 등을 담갔다. 뿐만 아니라 ‘밀주가’, ‘계주송’, ‘동정춘색부’등 각 술을 찬양하는 글까지 남겼다.
그는 마지막 유배지였던 해남도에서 자신의 양조경험을 바탕으로 ‘동파주경’을 저술하기도 했다. 동파주경에는 누룩 사용법, 재료 곡식 쓰는 법을 비롯해 ‘동파주’ 빚는 법 등을 기술해 놓았다. 동파주는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도 수록되어 있는데 놀라운 것은 지금도 ‘동파주경’의 누룩 사용법이 양조기술과 문화에 끼친 영향을 연구하는 학술논문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요즈음 소동파가 태어난 사천에서는 소동파주가 생산되고 그가 묻혀있는 하남성에서는 동파주를 양조하여 시중에 내놓고 있다. 소동파의 이름이 붙은 음식은 동파육 외에도 동파병, 동파두부, 동파주자 등이 있다. “누구나 소동파를 알지만, 아무도 소동파를 모른다”는 말들을 왜 하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간다.
예종석 한양대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