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상호관세(일본 24%) 부과에 일본 정부와 정치권은 예상하지 못한 수준이라는 반응 속에 대책 마련에 부산한 모습이다. 일본 언론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을 작심 비판하기 시작했다. 일본 기업들은 미국 내 생산량을 늘리는 등 대응책 마련에 나섰다.
○“미국은 눈을 뜰 때다”
후지이 아키오 니혼게이자이신문 논설주간은 6일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대통령이 된 지 2개월 반. 미국이 많이 변해버렸다고 느끼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과 관련,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는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많은 경제학자는 관세 인상 경쟁이 세계 경제에 타격을 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높은 관세는 미국의 물가 상승으로 이어져 경기 침체와 인플레이션이 동시에 진행되는 스태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도 나오고 있다”고 덧붙였다.
후지이는 “어느 나라든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은 당연하다”면서도 “다만 지금의 정책이 정말 미국에 도움이 될지는 의문”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상품 무역적자나 제조업을 중시하는 대통령은 미국이 약해졌다고 느끼는 것 같지만, 아직도 미국은 세계 제일의 경제 대국이며 글로벌 경제의 승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높은 관세로 인플레이션이나 경기 악화가 진행되면 저소득층 삶을 더욱 압박하고 격차를 확대할 우려도 있다”며 “해외에 대한 공격은 미국에 부메랑처럼 돌아온다”고 강조했다. 캐나다와 유럽에서는 미국 제품 불매 운동도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부연했다.
후지이는 “중국의 군사적 대두로 미·일 동맹은 미국이 일방적으로 일본을 지키는 동맹이 아니라 아시아·태평양 안보의 요충지로 바뀌었다”며 “국제 정세가 격변하는 가운데 미국이 일본과 유럽에 부담을 요구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경제적으로 공격하는 것이 동맹 강화로 이어질 것 같지는 않다”고 강조했다.
이어 “오히려 미국의 소프트파워가 저하되고, 미 달러의 기축통화로서 지위를 훼손할 우려도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미국을 위대하게 만든 것은 전후 국제질서 구축에 지도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라며 미국의 친구 중 한 명으로서 미국이 빨리 깨어나기를 바란다”고 호소했다.
○日 닛산, 美 증산 검토
트럼프 대통령이 강력한 관세 정책을 밀어붙이면서 일본 기업들은 대응책 마련에 애쓰고 있다. 발 빠른 기업은 관세 압박을 줄이기 위해 미국 내 생산량을 늘리거나 제품 가격을 인상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고려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일본 규슈 후쿠오카현 공장에서 미국 수출용 차량을 생산해 왔던 닛산자동차는 이르면 올여름부터 이 물량을 미국에서 생산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닛산은 지난해 미국에서 약 92만대를 판매했는데, 그중 16%에 해당하는 15만대를 일본에서 수출했다.
닛산이 미국 내 증산을 추진하는 차량은 스포츠유틸리티차(SUV) ‘로그’다. 후쿠오카 공장에서는 로그를 연간 12만대가량 생산해왔다. 실적 부진에 빠진 닛산은 당초 미국 공장 생산량을 줄일 방침이었으나,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으로 감산 계획을 철회하고 증산을 결정했다.
이 신문은 “다른 자동차 업체도 일본에서 미국으로 생산을 이전하는 사례가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 자동차 업체 중 일본산 차량을 미국에 가장 많이 수출하는 도요타자동차는 당분간 현 체제를 유지하면서 대응 방안을 검토할 것으로 보인다.
○이시바, 트럼프와 전화 협의 추진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는 지난 5일 상호관세 조치와 관련해 트럼프 대통령과 전화 협의를 할 뜻을 밝혔다. 니혼게이자이신문 등에 따르면 이시바 총리는 이날 요미우리TV 프로그램에서 “어떻게 하면 미국의 고용을 만들고 일본의 이익이 되는지를 이야기하고자 한다”며 “내주 중에는 (전화 협의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최종 결정은 트럼프 대통령밖에 할 수 없다”며 양국 정상 간 관세 문제에 대해 직접 교섭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 정부가 교섭에서 제시할 구체적인 방안도 준비하고 있다며 “하나의 세트나 패키지 등으로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보복 조치에 대해서는 “폭언을 폭언으로 응수하는 식은 할 생각이 없다”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지난 2월 트럼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이 비교적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들었던 이시바 총리는 그동안 일본을 관세 적용 대상에서 배제해줄 것을 미국 측에 요청하는 전략으로 일관해왔다. 그러나 자동차 관세나 상호관세 등에 일본이 포함되자 곤혹스러운 입장에 몰린 상황이다.
일본 정부는 추가 경제 대책이 불가피한 것으로 판단하고 추경 예산 편성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시바 총리는 지난 4일 추가 대책 마련에 야당을 비롯한 초당파적 협조를 얻기 위해 취임 후 처음으로 여야 당 대표 회의도 열었다. 일본에서 여야 당 대표 회의는 주로 대형 재난 발생 시 대응책 모색을 위한 자리로 마련돼왔다.
도쿄=김일규 특파원